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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질주시대의 라디오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6-11-20 00:00

영상문화가 절정에 이른 시대를 살고 있다. 물체의 모양은 더욱 자극적으로 변하고, 색깔은 자극의 극점을 향해 경쟁적으로 치달아 현란하다. 망막을 통해 시신경을 타고 우리 뇌에 전달되는 영상신호들은 한 치, 한 호흡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고 우리 안에 질주하며 신경체계를 유린한다.

설사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해도 거리는 물론이고 온 도시 곳곳에 포진한 채 쉼 없이 발사되고 있는 각종 영상신호의 소용돌이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길은 거의 없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사람들이 영상에 맞서 거부하고, 영상 앞에서 한 순간에 눈을 감아버린다고 해도, 이미 영상신호가 습관되어버린 사람들은 오히려 더욱 심한 공포감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감음으로 인해 더욱 생생해지는 것은 아주 많다. 영상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로부터 앗아간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혜다. 끝없이 확장하려는 상상력은 영상이 주는 한계 안에서 차단되고, 깊이를 더하려는 욕구를 지닌 지혜는 영상의 얄팍한 현혹에 맥없이 휩쓸린다. 영상의 유한성과 가벼움이 무한한 우리의 상상력과 현명함을 침해한지 오래다.

영상시대가 우리에게 안긴 또 하나의 상실은 바로 여유공간이다. 무한한 속도로 질주하는 영상은 우리의 숨통을 꽉 쥐고 좀처럼 놓아주질 않는다. 이런 숨막히는 영상시대에 있어 한국의 대표적인 미의식(美意識) 가운데 하나인 소박미는 소멸해 간다. 우리의 질박한 항아리로 대표되는, 노리는 것 없는 순박한 아름다움은 찾을 길이 막막하다. 노리지 않는 걸 절대 노리지 않는 영상의 질주에서, 소외된 것들은 저마다의 호흡공간을 상실한 채 방황한다.

라디오가, 라디오시대가 그립다. 가볍고 얕은 표정의 시대에 살면서 깊고 그윽한 음성(音聲)의 시대가 그립다. 라디오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그 비싸다던 라디오를 장만한 어느 부잣집 영감님은 신기하기 만한 라디오를 온종일 듣다가 하인에게 분부하는데, 저 안에 든 양반이 저렇게 쉬지 않고 말을 해대니 얼마나 목마르고 시장하시겠느냐, 어서 뭐 좀 차려서 갖다 드려라.

실제로 당시의 라디오는 웬만한 가구만해서 사람이 들어가고도 충분한 정도였다고 한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 제 덩치보다 더 큰 건전지를 검정 고무줄로 칭칭 감아 등에 지고는, 우리의 상상력에 무한한 자양분을 공급하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또한 무척 그립다.

라디오는 눈에 보이는 만큼의 한계를 허물고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세상을 우리에게 안겼다. 그러나 라디오는 밀어닥치는 영상시대 앞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다. 영상시대에서의 생존을 위해 입체적인 소리를 지향했지만 그것은 라디오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그 매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 다시 라디오는 더욱 라디오다워야 한다. 라디오의 언어는 절제되어야 하고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영상시대의 틈새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상이 도저히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 라디오의 세상을 더욱 탄탄하게 열어야 한다. 유치해진 라디오는 깊은 음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질주하는 영상시대에 점점 제한되는 상상력의 돌파구는, 가빠진 숨을 고르는 휴식 공간은 이제 라디오가 내놓아야 한다.

라디오여, 다시금 너의 시대를 큰 소리로 노래하라. 혹시 불편하고 촌스러운 옛날로 세상을 되돌리려 한다는 비난에 닥친다 하더라도 절대 굴하지 마라. 연암(燕巖)선생의 글에서 인자(仁者)가 말한다. 평생 장님으로 지내다가 눈을 뜬 그대, 오히려 눈을 떠서 늘 다니던 길 헷갈리고 잘 모르겠거든, 도로 눈감고 가시오.

*필자 김기승은 1979년부터 극단76극장, 극단 실험극장, 환 퍼포먼스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오기 직전 PMC 프로덕션 등을 중심으로 공연계에서 활동했고 연극, 뮤지컬, 영화, 콘서트, 라디오 등 100여 편의 작품들에서 연기, 연출, 극작, 기획 등을 맡아왔습니다. 제목 '추조람경'(秋朝覽鏡)은 당(唐)나라 설직(薛稷)이 쓴 시의 제목으로, 제자(題字)는 필자가 직접 썼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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