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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icide Bluff에 올라 두보의 운을 빌리다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3-01 00:00

登自盡臺借韻杜甫之作登高
Suicide Bluff에 올라 두보가 지은 '登高'의 韻을 빌리다.
 
宿雪十尺雪又來 묵은 눈이 이미 십척 하얀 눈이 또 내리나
遊目乾坤寒華開 눈을 들어 천질 보니 추운 눈꽃 만발하네
暴風驟雪天簫咽 거센 북풍 눈보라에 하늘퉁소 울어외고
衣氷萬樹猶不拜 얼음투성 온 나무들 그 와중에 곧곧하네
異國艱難三十年 뼈 고달픈 이민생활 삼십년이 경과하니
沒齒禿頭今上臺 이빨없는 대머리로 자진대에 올랐구나
飄泊天涯老病人 하늘 끝의 떠돌이라 몸은 늙고 병이 들어
笑看孤松依一杯 술 한잔에 웃음지며 외로운 솔 바라보네
 
丙戌陽十二月十四日與四人登自盡臺在暴雪之中梅軒痛吟
병술년 양12월 14일 네사람과 함께 폭설속의 Suicide Bluff에 올라 매헌은 통쾌히 읊다

칼 융은 주역이 인과율의 원리가 아닌 동시성의 원리를 담고 있는 매혹적인 생각이라고 설명한다. 즉 인과율은 어떤 원인에서 어떤 결과로 발전했는가를 따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동시성은 사건의 우연한 일치를 단순한 우연 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사건이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의 꿈, 예감, 무의식 같은 주관적인 상태와 기묘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교감이 가능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한시라는 게 원래 옛날 선비들의 멋갈스런 풍류요, 아름다운 교감 행위였다. 그들은 그냥 술만 마시며 노는 게 아니라 반드시 시를 지어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니, 시는 격조 높은 사교문화의 백미였던 것이다. 한 선비가 시를 지으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 운을 그대로 밟아 다시 시를 지어 가는데 이를 차운(次韻)한다고 하며, 이미 어떤 사람이 지어 놓은 시의 운을 빌려와 작시하는 경우는 운을 꾸어온다는 뜻인 차운(借韻)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위대한 시의 운을 밟아 대리만족을 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일종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시가 나올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무대, 그리고 심경이 서로 맞아 떨어지면 더더욱 좋은 것이다.

필자는 이날 혹독한 눈보라를 헤치며 어렵사리 올라간 시무어 마운틴의 Suicide Bluff에 올라 두보의 운을 빌릴만한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것이다. 그것도 두보가 남긴 주옥같은 수백편의 작품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등고(登高)'의 운을 빌리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금상첨화(?)로 만성치주염을 앓고 있던 나는 그저께 경제적인 틀니를 맞추기 위해 아래쪽 이를 아예 모조리 뽑고 합죽이가 되어 있었고 목적지의 이름이 자진대(自盡臺)였으니.... 나는 투병기간 중 두보의 한시집을 갖고 단독 등산을 할 만치 그의 시에 완전히 압도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이 '등고'라는 시를 중국어 발음으로 암송할 때마다 동병상련의 정이 끓어올라 산정상에서 나 홀로 많이 울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내가 운을 빌려온 시성(詩聖) 두보의 그 시를 소개한다.

登高
風急天高猿嘯哀 세찬 가을바람 하늘은 높고 잔나비 울음 애잔한데
渚淸沙白鳥飛廻 물맑은 강섬 모래는 희고 그 위를 돌아드는 새들
無邊落木蕭蕭下 끝없는 광야 나뭇잎은 우수수 낙엽 되어 떨어지고
不盡長江滾滾來 양자강은 저리도 도도하게 물결치며 흘러흘러 오는구나
萬里悲秋常作客 만리밖 타향살이 이다지도 슬픈 가을, 오갈 데 없는 나그네 신세
百年多病獨登臺 이몸 늙어 병은 들어 아무도 없는 이 언덕을 나홀로 올랐구나
艱難苦恨繁霜鬢 뼈고달픈 고생살이 한이 되어, 귀밑머리 하얗게 서려버려
燎倒新亭濁酒杯 절망에 빠진 이몸 술도 끊어 버렸으니 아 나의 신세 처량하네

이시는 두보가 폐결핵에 걸린 행려병자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객사하기 전인 56세 때 지금의 호북성 기주에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한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끌고 쓸쓸히 아무도 없는 언덕에 올라 자신의 웅혼한 절명시를 지었던 것이다. 기승전결의 각련이 전부 대(對)를 이루어 전무후무한 작품으로 지금까지 애송되고 있다. 우리말 번역을 읽어도 가슴이 찡해오지만 더 깊은 감상을 위해 해설을 붙여본다.

<1·2행 기련>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적막한 가을하늘에 울려 퍼지는 잔나비 울음 가슴을 찢고, 파아란 강물에 하얀 모래가 밀려오는 강 섬 위로 철새들이 날아드는 정경이다. 소리, 색깔, 동(動), 정(靜), 상, 하 총 6개의 다른 각도에서 가을바람, 높은 가을하늘, 애끓는 잔나비 울음, 강 중의 작은 섬, 코발트빛 강물, 하얀 모래, 날아드는 철새 등 7개의 대상물을 한 폭의 색조대비가 강한 유화처럼 14글자에 실어 '애수'라는 테마로 수렴하고 있다. 그래서 시가 그림보다 한수 위라는 것이고, 이런 시가 지어지면 바람과 비가 놀라고 귀신이 통곡을 한다고 했다(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3·4행 승련> 끝간데 없이 펼쳐진 대륙의 가을들판, 낙엽은 우수수, 도도히 흐르는 양자강, 파도는 넘실거려 밀려오는 정경이다. 제 3행은 제 1행을 받아 이미 높은 언덕에 올라 와 있음을 그려낸다. 그리고 제 4행은 제 2행을 받아 언덕에서 멀리 조망하고 있음을 행간으로 그려낸다. 기련의 구체적이고 개별적 경물묘사가 승련에서 큰 그림으로 확대되는 필세로 '가을'이라는 테마를 광활하게 처리하면서 애수적 분위기를 강렬하게 그려내는 기법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두보의 귀신이 통곡할 필치이다.

<5·6행 전련> 만추의 풍광에 젖은 나그네의 심정, 광대하게 전개된 가을 들녘으로 마음껏 눈을 달리던 작자가 심중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비로소 의식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만리'는 머나먼 객지를 뜻한다. '悲秋'는 처량한 계절을, '상작객'은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 '백년'은 황혼의 나이를, '다병'은 노쇠하여 병들음, '대'는 외높은 곳, '독등대'는 친구가 없음을 뜻한다. 그는 14개의 글자사이에 여덟 가지 의미를 정확한 대비속에 농축시키고 있지 않은가.

<7·8행 결련> 두보는 당시 안록산의 난이라는 내란 속에 피난만 다닌 사람이다. 몸은 늙어 백발이 성성하고, 출세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 서생, 게다가 폐병까지 들어 술까지 금하고 있었다. '료도'는 낙심하여 실의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 '정'은 술을 끊었다는 정지의 의미이다. 한심한 신세를 달래는데 그래도 술 한잔 하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없는 그의 처절한 독백이 가슴을 저며온다.

그러나 나는 그의 운을 무엄하게 빌려왔을 뿐이지 어찌 그의 신들메나 들 수 있는 존재이겠는가. 그는 수미산보다 높은 정상에 우뚝 선 인류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는 시성(詩聖)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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