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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현(無絃)의 금(琴)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7-04-02 00:00

가슴 한가운데 태산 같은 돌덩이가 앉은 듯 독한 답답함에 시달릴 때면 조금 멀리 나가 산 트이고 물 트인 곳을 걸어본다. 아니면 일부러 사람 드문 술집을 찾아 홀로 잔을 기울여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 잠시, 점점 다리만 아프고, 취하기만 할 뿐 독하게 짓눌리는 가슴이 좀처럼 나아지는 건 아니다. 여러 번의 경험에 의해 증명된 일이다. 그러면 우선 그 답답함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가슴을 짓누르는 그것이 답답함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막연한 앓음인지조차도 잘 모르겠으니 그저 속수무책이다. 그렇다고 달리 피해갈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니 짓눌리는 가슴 위를 취기에 겨우 의존하고 꾸역꾸역 걸어 보는 수밖에.

속이 죄 역류하는 듯한 시달림에서 문득 떠오르는 무현(無絃)의 금(琴), 말 그대로 줄이 없는 거문고(사실 금(琴)이라는 악기는 거문고와 생김이 비슷하기는 해도 거문고와는 다른, 이제는 없어진 옛 현악기라 한다.)를 일컬음이다. 줄이 없는 거문고니 당연 소리를 낼 수 없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악기가 어디엔들 소용이 있을까마는, 아주 예로부터 수많은 선학들이 이 무현금(無絃琴)을 화두로 들어 생을 음(吟)했다. 그 중에서도 한참을 거슬러 서기400년대쯤으로 가본다.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무제(武帝, 본명은 소연(蕭衍))의 맏아들로 태어난 소통(蕭統)은 태자(太子)에 봉해졌으나 즉위하기 전인 나이 서른에 세상을 떠나는데, 바로 비운의 태자 소명(昭明)이다. 군주의 자리에 오르진 못했으나 문학평론, 수많은 저술 등을 통해 길지 않은 자신의 생을 높은 경지의 문학으로 촘촘히 채운 인물이다. 소통의 편찬서 ‘문선(文選)’에서 드러나는, 문(文)과 질(質)의 상호균형을 강조한 그의 문학관은 후대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의 수많은 글 중에 도연명(陶淵明)의 일생을 써내려 간 ‘도연명전(傳)’이 있다.

도연명(陶淵明, 본명은 잠(潛), 연명은 자(字)), 쌀 닷 되가 아쉬워 소인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며 현령(縣令) 관직을 사임하고 홀연히 전원으로 들어가는 마흔 한 살의 그가 혼돈과 불의의 세상을 향해 고별사를 남기니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다. 도연명은 그 후 세상과 완전히 절연한 채 가난과 병고에도 불구하고 농경과 더불어 귀족적 유희문학이 아닌 따스한 인간미를 물씬 담은 시작(詩作)으로 살다가 예순 셋에 스스로 자신의 제문(自祭文)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소통은 이렇게 자신보다 백 년 정도 앞서 산 도연명의 전(傳)을 썼는데, 그 가운데 무현금이 등장한다. ‘현실을 비판하되 극히 적절하고, 회포를 풀되 넓고 참된 경지에서였다. 아울러 굳은 정절로 도에 머물러 절개를 지켰으며, 농사 짓는 걸 부끄러워 않고,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았다. 음률에 대해 아는 바 없는 연명이지만 항상 무현금을 옆에 지니면서 취흥이 오르면 이를 어루만지며 홀로 속뜻을 부쳤다.’ 소통은 불현금이야말로 형식과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참 자유에 이르는 고고한 정신세계를 구축한 도연명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도연명 후로도 헤아릴 수 없이 무현금은 깨달음과 참 자유를 잇는 통로였다.

천 년을 넘어 거침없이 도도한 도연명의 참 자유를 뒤로하고 다시 초라하게 떠는 나를 본다. 태산의 돌덩어리를 안고 기진맥진하는 내게 있어 무현금의 선율과도 같은 참 자유에의 비행(飛行)은 요원한 듯 하다. 엄습하는 나의 답답함과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앓음이 혹시 내 모습과 소리를 널리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에 기인하는 건 아닌지. 꼭 보고 들어야만 나를 확인하고 안심하는, 그런 처지와 욕망에 휘둘리는 건 아닌지.

…소리가 있어 듣는 것은 소리 없이 듣는 것만 못하고, 형체가 있어 즐기는 것은 형체 없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 (…聽之聲上, 不若聽之於無聲, 樂之形上, 不若樂之於無形…).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의 무현금명(無絃琴銘) 또한 수백 년이 넘도록 쟁쟁한데, 나는 언제나 정체 모를 시달림을 훌훌 떨구고 무현의 금을 타고 놀며 자유롭게 훨훨 날까, 정녕 그 날은 올까.

*필자 김기승은 1979년부터 극단76극장, 극단 실험극장, 환 퍼포먼스 그리고 캐나다로 이민오기 직전 PMC 프로덕션 등을 중심으로 공연계에서 활동했고 연극, 뮤지컬, 영화, 콘서트, 라디오 등 100여 편의 작품들에서 연기, 연출, 극작, 기획 등을 맡아왔습니다. 제목 '추조람경'(秋朝覽鏡)은 당(唐)나라 설직(薛稷)이 쓴 시의 제목으로, 제자(題字)는 필자가 직접 썼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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