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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가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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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07-05-12 00:00

1992년 일본 도쿄, 일본 굴지의 민간방송사인 TBS가 주최하는 동경국제가요제(東京國際歌謠祭). 당시 한국 대표로는 아직 신인의 태를 벗어나지 않은 가수 강수지. 참가곡은 ‘흩어진 나날들’, 작사는 강수지 본인이 하고 작곡 역시 신예 작곡가 윤상.

그 해의 동경국제가요제는 한국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내게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범 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참가한 동경국제가요제는 그 규모와 정교한 진행, 참가 가수들의 기량, 음악 수준, 연륜과 명성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가히 정상급을 자랑했고,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챙기고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일들도 참 많았다. 그 중의 하나가 가요제 연주를 맡은 오케스트라 편성을 위한 악보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길옥윤(吉屋潤) 선생이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한 편곡 작업을 맡았다. 선생은 그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미리 ‘흩어진 나날들’의 악보를 보내서 가요제 참가 일행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편곡악보가 완성되어 있던 터였다.

각 나라의 참가 일행은 도쿄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리는 가요제를 일주일 정도 앞두고 도쿄 현지에 도착해서 언론인터뷰, 리허설, 전야제 등 주최측이 마련한 여러 일정을 소화했다. 그렇게 분주한 가운데의 어느 날 저녁, 나는 도쿄의 한 모퉁이 작은 바에서 맥주 두어 병을 두고 길옥윤 선생과 마주 앉아 모처럼 한가한 짬을 나누고 있었다. 언뜻언뜻 평안도 억양이 묻어나는 거장의 음성은 그의 풍모만큼이나 아주 부드럽고 푸근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이번에도 느낀 건데, 요즘 젊은 작곡가들의 곡을 살펴보면 내가 젊어서 공부했던 음악이론하고 하나도 맞는 게 없거든. 내가 음악을 시작할 무렵에 그 고생스럽게 공부했던 화성법(和聲法)이니 대위법(對位法)이니 뭐 하나도 부합되는 게 없어, 그런 음악 이론들이 도무지 대입되질 않아. 순전히 내 음악공부에 입각해서만 보면 지금 젊은이들의 음악은 음악이 아닌 거지.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그 음악들을 들어보면 그렇게 좋거든. 요즘 젊은 사람들의 음악, 참 듣기 좋고 아주 훌륭해, 나보다 뛰어난 거 같아. 이번에 ‘흩어진 나날들’도 마찬가지야, 이론상으로 보면 당최 말이 안 되는데, 이 곡 참 좋잖아, 참 좋아.’

그 후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선생의 부음(訃音)을 들었으니, 결과적으로 선생과의 마지막 오붓한 시간이 되었지만 15년이 흐른 지금도 선생과 함께 했던 도쿄의 그 밤이 생생하다. 또 그 날 선생께 들은 이야기도 가끔씩 떠올라 생각에 잠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선생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변신(變身)을 거듭해서 매번 새롭게 다가왔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원로들의 자리에서는 으레 요즘 젊은 것들은, 하면서, 후학들을 아예 쥐뿔도 모르고 틀려먹은 애송이 취급하는 게 다반사인데, 젊은 음악가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작업을 칭찬하던 선생은 오히려 더 큰 산이었다. 거장의 내공과 카리스마는 후학들을 향한 따스한 미소와 음성 속에 더욱 높고 커다랗게 머무르고 있음을 되새기곤 했다. 자신보다도 후학을 통해 자기 분야의 더 나은 미래를 발견하려 애쓰는 거장의 모습이 그립다.

그 밤 선생의 그 이야기가 또 변신하여 내게 안기는 요즘의 상념은 머리인가, 가슴인가, 이다. 물론 흔한 이야기대로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동시에 지니는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을 건 없겠지만 어디 그게 보통의 일인가. 특히 자신만이 감당해야 하는 세상과, 어우러지고 부딪히는 모두와의 세상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예술가들에겐 더욱 난해한 숙제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나날이 뜨거운 가슴이 더 그리워져 그리로 자꾸 기우는 걸 감출 수 없다.

문학, 음악, 미술, 무용 등 거의 모든 예술이 학교(學校)로 들어간 이후로부터 예술은 날로 영악해지고 예술가들의 가슴은 날로 식어가는 추세다. 그저 바람만 닿는 곳이면 어느 땅인들 마다 않고, 가슴이 훨훨 타오르는 영문일랑 알려 하지도 않고, 세월과 고독이 또 혹독한 수련이 남긴 푹푹 패인 생채기 또한 아랑곳 않았던, 미련하도록 걷고 또 걷다가 끝내 큰 산이 되고야 마는, 그런 예인(藝人)들은 더 찾아보기 힘들다.

머리인지, 가슴인지, 또 선생은 어떤 생각하시는지, 도쿄의 그때처럼 어느 바에 앉아 여쭙고 싶은데, 선생은 가고 아니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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