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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②

밴쿠버 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08-02-25 00:00

바람의 땅 그리고 9일간의 트레킹

▲ 또레스 델 파이네의 주봉 파이네 그란데(3050m, 구름에 가린 봉우리)와 쿠에르노 델 파이네(2600m, 오른쪽 봉우리).파이네 서킷은 이 산군의 둘레를 한바퀴 도는 루트다.

감동을 주는 산에는 어떤 구성요소들이 있을까? 우선 완만한 능선과 그 기슭에 만발한 야생화. 또는 에메랄드 빛 호수와 들녘을 감싸며 구비구비 흐르는 강물. 아니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수직 암봉, 그리고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3000미터급 고봉들. 거기에 태고의 정적이 감도는 광대한 빙하까지 더해진다면…. 이러한 요소들이 순열하고 조합되어 환상적인 장관을 만들어 내는 곳 - 우리는 그런 산으로 갔다.

가는 길

또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길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 간단치 않은 경로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밴쿠버-LA-산티아고-푼타 아레나스. 이상은 항공 이동이고, 푼타 아레나스-푸에르토 나탈레스-파이네 국립공원까지는 각각 버스로 3시간이 소요된다. 밴쿠버가 위치한 북위 50도에서 남위 50도까지 수직 남하해야 하니 그 길이 멀 수밖에 없다.
LA공항에서 떠나는 산티아고행 란칠레 항공은 출발지연을 거듭한 끝에 예정 시간에서 거의 5시간이나 지체한 후에야 탑승을 시작했다. 그 이유가 우습게도 기내 화장실의 고장 난 변기 수리였다.
변기가 튼튼해진 비행기는 LA를 떠난 지 약 9시간 만에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다. 1인당 미화 132달러나 되는 터무니 없는 비자료를 내고 입국했으나, 란칠레 항공은 우리를 순순히 놓아주지를 않았다. 트레킹 장비가 들어있는 내 배낭이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고장수리 다섯 시간 지연에 배낭까지 행방불명이라…. 오늘의 운세를 신봉하는 사람 같으면 초장부터 꼬인다고 사나운 일진을 탓하겠지만, 사실 여행을 자주 하다 보면 이런 일은 다반사다.
LA공항에서 미아가 된 내 배낭은 내일 첫 비행기편으로 푼타 아레나스 숙소로 배달해 주기로 약속을 받고 공항을 나왔다. 멀리 산티아고 도시 뒤로 황갈색의 안데스 산맥이 남북으로 가로막아 서 있고, 그 산맥을 넘지 못한 스모그가 도심 위로 띠를 형성하고 있다.
이날은 산티아고의 허술한 배낭족 전용 게스트 하우스에서 1박을 한 후, 다음 날 새벽 칠레의 최남단 도시 푼타 아레나스로 날아갔다.
  
푼타 아레나스

섭씨 30도를 웃도는 산티아고에서 4시간 반 만에 지구상 가장 남쪽의 도시에 도착하니 바람이 불어대고 기온이 서늘했다. 서둘러 플리스 재킷을 꺼내 입었다.
활주로 한편에는 칠레 공군의 전투기 격납고가 늘어서 있다. 거의 4400km나 되는 좁고 긴 국경선을 어떤 방어 개념으로 지킬지 궁금하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도로변 들판에는 노란 꽃들이 남극의 바람에 시달리고 있다.
처연한 마젤란 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푼타 아레나스는 마젤란 항로가 열린 이후 한때 번성했던 항구도시였으나, 20세기 초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인구 12만 여명의 이 도시는 이제 칠레의 군사기지와 얼마간의 산업시설이 있을 뿐, 황량한 툰트라 지대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쓸쓸한 바람이 수시로 몰아치는 회색의 도시다.
기다리던 배낭이 이날 저녁 무렵에 기름과 먼지에 범벅이 된 채, 숙소로 배달되었다. 집 나갔던 자식이 돌아온 것처럼 너절해진 배낭을 부둥켜 안았다. 짐을 모두 풀어서 트레킹에 필요한 것을 따로 분류해 두 배낭에 다시 싸고 나머지는 숙소에 맡겼다.
배낭 때문에 예정에 없던 하루를 허비한 꼴이 되었지만,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우리는 트레킹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에 배낭을 싣고 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푼타 아레나스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는 하루 일곱 차례가 있다. 우리는 어제 훼르난데즈 버스터미널에서 예매해 놓은 표로 아침 9시 버스에 올랐다. 버스 짐칸에는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가는 배낭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버스가 툰드라 팜파스 초원 위를 달리는 세시간 동안 우리는 차창으로 스며든 따뜻한 햇살에 몸을 의탁한 채, 포근한 잠에 빠져들었다. 
바람이 세차다. 청명한 하늘에 떠있는 구름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왔다. 거리에는 이미 날아갈 것들은 모두 날아가버린 뒤였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우리는 바람의 땅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맹렬한 바람 속을 걸어서 지도에서 보아 두었던 게스트 하우스 카사 세빌리아에 방을 잡았다. 가이드북에 소개된 이 숙소는 마을의 외곽에 자리잡고 있지만, 이곳에서 트레킹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트레킹 지도와 스토브 연료도 구입했다. 무엇보다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가는 버스가 이 집 앞에 정차하는 것이 편리했다.
숙소를 구했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가벼운 기분으로 마을 정찰에 나섰다. 인구 2만의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또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으로 가는 트레킹과 관광의 기점이 되는 도시로, 예상했던 대로 저렴한 호스탈과 장비대여점, 레스토랑, 트레킹이나 관광을 주선하는 여행사들이 몰려 있었다. 거리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의 복장만으로도 트레커인지 일반 관광객인지 쉽게 구별이 된다.
우리는 거리 중앙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려 내일부터 일용할 양식인 빵, 소시지, 치즈, 수프, 비스킷 등을 구입했다. 마켓 안에는 우리처럼 트레킹 식량을 준비하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돌아 오는 길에 숙소 근처에서 양고기 전문 식당을 발견했다. 식당 입구에 양 한 마리를 통째로 걸어놓고 종일 장작불에 구워내고 있다. 평소 양고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다소 과다한 지출이 우려되었지만, 이 기회에 트레킹에 필요한 단백질을 보충해주기로 했다. 장작불에 잘 구워진 양갈비에 레몬즙을 뿌려서 토마토 양파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데, 우리는 항상 이 맛에 감동하곤 했다. 그 중에서 중국 신장성의 카쉬가르, 그리스, 이집트, 두바이에서 먹었던 양고기가 아직도 미각을 자극한다. 포식을 하고 나니 몇 일간의 에너지가 충만해진 기분이다. 
밤이 되자 어느새 먹장 구름이 온 하늘을 덮어버리고 바람은 더욱 드세졌다. 이날 밤, 우리는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거센 바람을 만났다. 온 마을을 바다 물속으로 쓸어버릴 것만 같은 강풍이 밤새 몰아쳤다. 건물의 관절마다 바람을 못 이겨 삐꺽삐꺽 신음소리를 냈다. 우리는 그 어느 영화의 특수효과음 보다 더 실감나는 광풍소리에 지난 밤을 설쳤다. 공포스러운 바람이었다. 바람이 미쳤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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