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글과 담 쌓은 세대] '크리(상황이 악화됨)', '병맛(어이없음)'… 입만 열면 인터넷 은어

밴쿠버조선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0-11-01 11:17

서울 개봉역 주변의 한 PC방. 중·고교생과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까지 약 20명이 모여 있는 PC방 안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초등학생 송모(12)군이 눈에 띄었다. 옆 자리에 배낭형 책가방을 던져 놓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송군은 '서든 어택'이라는 전쟁 게임에 빠져들었다.

"책이요? 그런 건 학교에서만 읽어요." 하루 1~2시간씩 인터넷 검색을 하고 텔레비전은 1시간 이상 본다는 송군이 그렇게 말했다. 수업 중에 읽은 교과서 빼고 올해 읽은 책 제목을 대 보라고 하니 "다 만화책인데 제목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서울의 한 PC방에서 초등학생을 비롯한 청소년들이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는 ‘국어 파괴’는 아이들과 어른세대의 단절을 가져온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내용에 대해선 "공룡이 나오고…"라고까지 말한 뒤 2~3분가량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적당한 문장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공룡이 나오고 그냥 그게 끝이에요"라고만 했다. 무슨 질문을 하든 답변은 단답형으로 끝났고, 무언가를 조리 있게 말로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 듯했다.

활자를 멀리한 결과 논리적인 생각과 표현이 서툴러진 학생들이 자기들끼리만의 언어 세계에 빠져들면서 기성세대와의 높은 '언어의 담벼락'이 만들어지고 있다. '쩔다'(대단하다) '현시창'(현실은 시궁창) '시망'(시원하게 망했다) 같은 인터넷 은어로 의사소통을 해 부모·교사와 단절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난달 한국교총이 내놓은 설문결과는 이 같은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병맛'(어이없음·'병신같은 말') '레알'(정말) '담탱이'(담임교사) '열폭'(열등감 폭발) 등 비교적 잘 알려진 청소년 은어·비속어 10개의 의미를 유·초·중·고교 교원 455명에 물었더니 5개 이상 맞힌 사람이 44%에 그쳤다. 66.1%는 학생들 대화의 반 이상이 비속어·은어·욕설이라고 답했다. 학생들의 언어가 망가진 원인으로는 인터넷(49.2%)과 방송·영화(34.2%)를 꼽았다.

한 청소년이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올린 글. 개학하자마자 오후 10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돼 벅찬데 통학버스마저 만원이라 최악의 상황이라는 요지의 글인데, ‘젝일(제길)’ ‘째다(허락받지 않고 빠지다)’ ‘크리(상황이 악화됨·‘치명적인’을 뜻하는 크리티컬의 약자)’ 등 이상한 말이 많아 뜻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인터넷 화면캡처

인터넷 공간에서는 'ㄱㄱㅁ?'(어이없다) 'KIN'('즐'을 왼쪽으로 눕혀놓은 모양·짜증 나니 꺼져라는 뜻) '려차'(욕설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한글 자판으로 친 것) '개드립'(분위기를 망치는 즉흥대사나 연기) 등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들이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처럼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를 해독하는 웹사이트가 필요하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국립국어원 김세중 공공언어지원단장은 "청소년들이 쓰는 은어를 게임회사에서 채택해 학생들이 게임을 하면서 이를 배워 확산되기도 하고, 방송에 나오는 비속어를 학생들이 받아들이기도 한다"며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비속어·은어들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과 담을 쌓은 학생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평소 쓰던 습관대로 또는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말들을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거나 옮기면서 급속히 퍼져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빠릴'(빨리) '젭라'(제발) 등 자판을 잘못 친 단어마저 은어로 굳어지는 경우도 있다. 엉터리 단어가 표준어를 몰아내는 격이다.

'안습(안구에 습기차다, 안타깝다)' '흠좀무(흠 좀 무서운데)'처럼 기존의 조어(造語)구조를 파괴한 인터넷 은어들은 그저 한때의 장난처럼 무심히 볼 게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상규 전 국립국어원장(경북대 교수)은 "정확한 콘텍스트(context·문맥)를 따라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어휘가 깨지고 문장이 부서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이렇게 되면 사고력과 창의력이 신장될 수 없고 심리적인 조울증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학생들은 표준말과 문법에 맞는 글에 대한 개념조차 잃어가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김승찬 장학사는 "중학교는 물론이고 고교에서도 자기 멋대로 쓰고 말하는 학생들을 자주 보는데 자기가 틀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조규익 숭실대 인문대학장은 "디지털시대의 아이들은 활자조차도 하나의 이미지로 바라볼 뿐 심리적인 낭독(朗讀)의 과정은 생략하고 있다"며 "그 결과 글을 쓰면 일상 언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앞뒤가 맞지 않는 비문(非文)투성이가 되고, 의사소통이 부정확해져 '소통의 부재(不在)'현상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2012년 7월 밴조선 5대 뉴스 1.한국인 발길 줄어든 캐나다…캐나다 이민부 통계에 따르면 2011년 한국 출신 영주권 취득자는 4573명으로 2010년 대비 18% 감소했다. 유학생 숫자 역시 8178명으로 1999년 이래 처음으로 1만명 선을 밑돌았다. 이민자 감소는 캐나다 국내...
ADVERTORIAL
한아름 마트가 오는 20일 메트로 밴쿠버내 4번째 점포를 리치몬드에 연다.그간 한아름은 2003년 코퀴틀람에 캐나다 1호점을 개점한 후,  2006년 밴쿠버점과 랭리점을 열어 한인의 편의를...
16개 업체 이용중...독점계약설에 긴장
밴쿠버 국제공항(YVR) 택시정류장 이용권을 놓고 밴쿠버 택시업계가 갈등을 빚고 있다.공항관리공단과 계약을 통해 공항내 택시정류장을 이용하는 택시업체 현재 16개다. 이 가운데 9월...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국 의원 3명의 입국을 막은 한국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기도, ‘선진국’이라 말하기도 어렵다고 보도했다.신문은 2일 “간(菅·간 나오토 총리를 지칭) 내각, 양보와 배려에 대한 한국의...
▲ 일본의 한 게시판에 올라온 한류 반대 그림. 일본 시청자가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니다'라고 말하는 사람(한국인)이 등장해 괴로워한다. 현지에서는 이처럼 한류와 후지TV에 대해 토론하는 게시판만 최근 500개 이상 생겨났다. /2ch 캡처.   한류(韓流)...
합동참모본부는 21일 구출작전 개시 3시간 만에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됐던 삼호주얼리호 선원 21명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밝혔다.이성호 합참 군사지원본부장(육군 중장)은 이날 오후 국방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적의 주력을 경비하거나 선원의 안전을...
캐나다 연구진 공동 연구결과…해안선 침식전망
빅토리아대와 캘거리대 연구진은 공동으로 인류가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배출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더라도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예고한 것과 비슷한 재앙이 향후 1000년 동안 일어날 것이라는 연구보고서를 9일 발표했다. 연구진은 향후 100년간 해수면이 최소한...
▲ 지난 23일 북한의 포격에 신병교육대에서 교육중인 신병 10여명을 대피시킨 정연하 일병. /연합뉴스 북한의 기습포격 발생 3일이 지난 26일 연평도에 대한 빠른 복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빗발치는 포화 속에 피어난 연평부대원들의 ’해병정신’이 속속...
"내가 전용기 한번 안타면 학교 하나 생겨" 한국-페루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차 14일 한국을 방문한 알란 가르시아 페루 대통령의 ‘서민 행보’가 눈길을 끌고 있다. 가르시아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이번 방한 때에도 전용기가 아닌 일반 항공편을 이용했다. 그는...
“평가기관ㆍ방법 따라 순위 크게 달라져” 미국의 유력지 뉴욕타임스(NYT)는 14일(현지시각) 세계 주요 대학들이 홍보에 널리 활용하는 대학순위의 평가방식에 많은 맹점이 있다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NYT는 지난 9월 ’더 타임스-QS 세계대학평가’에서 일약 세계...
당구 차유람 '외모' 逆스트레스… 외국언론까지 관심가져 큰 부담 당구 대표 차유람(23·사진)이 15일 광저우 아시안게임 9볼 여자 단식 1회전에서 수하나 삽투(말레이시아)를 7대3으로 꺾고 16강에 올랐다. 처음 세 경기를 내줬지만 곧 집중력을 되찾아 7경기를...
서울 개봉역 주변의 한 PC방. 중·고교생과 나이 지긋한 중년 남성까지 약 20명이 모여 있는 PC방 안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초등학생 송모(12)군이 눈에 띄었다. 옆 자리에 배낭형 책가방을 던져 놓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송군은 '서든 어택'이라는 전쟁 게임에...
60년 만에 만났는데… 눈물의 이별이산 상봉 종료 10분 전… 2박3일 감정 자제하던 北가족들 울음 터뜨려"이제 다시는 못볼 텐데"… "저승에서 만난다면 놓아 드리지 않겠다" "작별상봉 종료가 10분 남았습니다." 안내방송이 나오자 간간이 들리던 웃음소리가 모두...
경영 책임 회피하려 '포스트잇'에 결재한 뒤 나중에 떼어버리기도
C&그룹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임병석(49) 회장 등 C&그룹 경영진의 로비행태에 대한 고발과 증언들이 잇따르고 있다.검찰은 임 회장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법인카드를 나눠줘 로비한 정황 외에도 각종 비리 관련 정보를 입수, 입증자료를...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