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앙코르 내 인생] 백마부대 부사단장에서 어린이집 영어 교사 된 이상봉(79)씨

정리=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1-05-09 12:27

"통역장교 시절 익힌 영어, 이젠 아이들에게 가르쳐요"

6·25때 참전해 월남에도 다녀왔다
전역 후 쉰셋에 대학원 들어가 교원 자격증을 땄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목사님 얼굴'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내 인상까지 바꿔놓았다

"에이, 피, 피, 엘, 이. 애플(Apple)."

앵두 같은 작은 입술들이 내 입을 따라 오물오물 움직인다. 요 녀석들 얼마나 잘하는지, 금세 집에 가서 냉장고 문을 확 열어 사과를 가리키며 엄마에게 묻는단다. "엄마, 사과가 영어로 뭔지 알아? 애플이야, 애플. 우리 할아버지 티처(teacher)가 알려줬어."

'노랑머리 젊은 원어민 영어 선생님이 판치는 요즘 웬 할아버지 토종 영어 선생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엄연한 영어 선생님이다. 그것도 우리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스타 선생님'이다.

지금은 아이들 앞에서 넉넉한 웃음을 짓는 할아버지 영어 선생님이지만 젊은 시절 나는 날아오는 총알 앞에서도 꿈쩍 않는 용맹한 군인이었다. 군인의 길은 내겐 운명이었다. 18세에 학생 신분으로 6·25전쟁에 혈서(血書) 지원했다. 아직도 내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그때 도려낸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린 나이에 목격한 전쟁의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이 땅에서 되풀이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1953년 전쟁중에 육사에 입학해 1983년 백마부대 부사단장으로 전역할 때까지 30년간 군인으로 살았다.

1972년 맹호부대 60포병대대 대대장으로 월남전 에 참전했을 때 모습. 오른쪽 세 번째 지휘봉을 들고 있는 사람이 이상봉씨다.
영어와 인연을 맺은 건 1959년 육군 부관학교의 군사영어반을 졸업하고 통역장교가 되면서였다. 이후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 최초의 유도탄 부대 창설 요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2년간 근무하면서 본토 영어를 익혔다. 당시 나는 미군의 유도탄 교육 내용을 영어로 동시통역해 우리군 관계자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군대 내에서 통역 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영어의 달인'으로 통했다. 영어를 잘해 특이한 경험도 많이 했다. 미국 남성과 한국 여성의 국제결혼 식장에서 동시통역으로 주례를 선 적도 있다. 1972년엔 맹호부대 60포병대대 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접전 속에서 우리 부대원 500여명 중 단 한명도 목숨을 잃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봐도 기적 같은 일이다.

한평생 군에만 있을 것 같았던 내게도 전역(轉役)의 순간이 왔다. 1983년 군을 나와 운 좋게 한 대기업에서 상임고문으로 7년간 일했다. 새로운 일이라 흥미로웠지만 먼 미래를 보고 긴 호흡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찬찬히 생각해봤다. 잘하는 건 군대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였고, 좋아하는 건 '아이'였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숱한 아이들의 희생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많은 편이다. 군대에 있을 때도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다. 1970년대엔 박봉을 털어 학용품이 부족한 울릉도 학생들에게 가방을 보내는 일을 했다. 내 평생 반려자인 아내가 어린이집을 운영해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된 측면도 있다.

이상봉씨가 인심 좋은 할아버지 표정으로 어린이집에서 햇병아리 같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영어와 아이, 이 두 가지를 인생 2막의 목표로 삼았더니 어린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는 목표가 자동적으로 설정됐다. 매사 완벽한 성격이었기에 허투루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지는 않았다. 집사람에게 묻어가는 것 아니냐는 소리는 더 듣기 싫었다. 1985년 쉰셋의 나이에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유치원 교사의 자질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고 교원 자격증도 땄다. 최고령에다 군인 출신 학생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교사로서 제대로 된 요건을 갖추고 1980년대 말 아내가 하는 어린이집에서 영어 선생님을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 수업은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아이들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좋아한다. 손자 손녀를 따라온 노인들이 교실 뒤에 앉아 알파벳을 따라 하기도 한다. 여느 유치원 영어 수업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것을 익히며 아이 같은 미소를 짓는 내 또래 노인을 보면 보람을 두 배로 느끼게 된다.

요즘 사람들이 나를 보고 '목사님 얼굴'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티없이 맑은 웃음이 내 인상을 바꿔 놓았다. 내가 군인이었다고 말하면 대부분 화들짝 놀란다. 목숨을 함께했던 전우들도 지금의 내 일상에 놀란다.

인생의 1막을 조국을 지키는 데에 바쳤다면, 인생 2막은 조국의 미래인 어린이를 위해 바치고 있다. 나의 여명(餘命)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이 땅의 어린이를 위해 살다 가고 싶다.

※ 앙코르 내 인생 관련 문의 이메일 encore@chosun.com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혁명 교감 - 2월에 군복 벗으니 슬프데… 대구 박 소장 만나서 말했지"서울에서 조직 상당히 했다" 며칠 후 박 소장이 올라와미국도 움직였다 - 지도자로 박병권 거론됐는데CIA 쪽에서 먼저...
밴쿠버 유학생활 경험담과 유익한 정보를 11일부터 30일 자정까지 vanChosun.com/edu에 올리면, 조회수와 내용의 충실성을 기준으로 14명을 선정해 1등 상품 아이패드2, Xbox 360, 로키여행권, 슈퍼마켓 상품권 등 상품을 드립니다. 이번 행사는 본보가 주최하고...
밴쿠버 커낙스가 2차전에서 만난 내쉬빌 프레데터스를 꺾고 17년 만에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서부컨퍼런스 결승에 올랐다. 커낙스는 9일 내쉬빌에서 열린 경기에서 프레데터스를 2대 1로 누르고 4승을 거둬 서부 컨퍼런스 결승(라운드3) 진출을 확정했다. 커낙스와...
환경단체, 추가예산 필요하다 주장
BC주 공원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환경단체 윌더니스 커미티(Wilderness Committee)는 최근 입수한 주정부 내부문서에서 지난 10년간  BC주 공원 관리 예산이 1000만달러 이상 삭감되어 화장실 휴지 같은 기본적인 공급품조차 마련하기 힘들다는 단서를...
美국회의원의 캐나다觀 분석결과
캐나다인은 보험료만 내면 무상으로 제공되는 의료혜택이 미국보다 낫다는 긍지를 갖고 있지만, 정작 미국인은 캐나다 의료제도를 부러워하지 않고 있다. 캐나다 국내 보수성향 싱크탱크, 프레이저 연구소가 10일 공개한 “미국의회는 캐나다를 어떻게 보고...
정치도 트위터 시대… 18週 3억8000만건 중 많이 등장한 정치인 살펴보니BBK수사팀 패소 덮으려고 청와대가 흘렸다는 음모론… 재보선 前 박근혜·오세훈 이후엔 유시민·손학규...
9월부터 금연 희망자 대상으로 12주 동안 지원
BC주정부가 흡연자들의 적극적인 금연 운동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니코틴 껌, 니코틴 패치 등 금연 보조제를 무료로 제공한다. 금연 보조제는 물론 금연을 위한 의료 처방전도 의약 보험을 통해 무료로 받을 수 있게 된다. 크리스티 클락(Clark) 주수상은 9일...
전문가들 “사스ㆍ신종플루와 발병 패턴 달라”정체불명의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진단받고 치료 중이던 산모가 10일 사망하면서 이 바이러스의 정체와 감염 경로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마이크로소프트가 36년 역사상 최대의 기업 인수를 노리고 있다.월스트리트 저널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인터넷기반 전화사인 스카이프(Skype)를 85억 달러에 인수하는 딜(deal)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10일 보도했다.성사되면, 마이크로소프트사로선 사상 최대...
어느 친구 이야기다. 그가 고등학교 다닐 때 무슨 상을 탔다. 그런 후 시골 사는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아들 다니는 학교에 찾아오셨다. 아들이 상 탄 게 너무 기뻤을 것이다.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은 초라한 차림의...
▲ MBC 나는 가수다 방송 캡쳐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를 통해 연일 화제를 뿌리고 있는 임재범. 이번에는 그의 저가 헤드폰이 화제다.임재범은 지난 8일 방송된 MBC의 나가수에서 자신의 곡 ‘너를 위해’를 통해 카메라 앞에 다시 선 소감과 밝히지 못했던...
"통역장교 시절 익힌 영어, 이젠 아이들에게 가르쳐요"6·25때 참전해 월남에도 다녀왔다전역 후 쉰셋에 대학원 들어가 교원 자격증을 땄다사람들은 나를 보고 '목사님 얼굴'이라고 한다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내 인상까지 바꿔놓았다"에이, 피, 피, 엘, 이....
"부모님은 나에게 내 삶을 주시고(give me my life), 이후엔 당신들의 삶까지 주시는(give me even their life) 분들이다."그저께(the day before yesterday)가 어버이날(Parents'Day)이었다. 미국에선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Mother's Day), 6월 셋째 일요일을 아버지의 날로...
왜 하필 그때 정전? "美·파키스탄 정부사전 합의, 마을전기 끊어" 주민들 수군"신고했더라면 내 팔자는…"땅 치는 동네 사람들 많아최첨단 스텔스 헬기? 내가 들었던헬기 소리 중 가장...
▲ 뉴욕시립대 대학생 모리스 해러리가 개설한 '오사마 사망 티셔츠' 홈페이지 화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직후 그의 죽음을 축하하는 티셔츠를 만들어 판매한 미국의 한 대학생이 닷새 만에 30만 달러(3억25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9일 “남의 죽음을...
▲ 시어머니(오른쪽)에게 신장을 이식 해준 '딸 같은 며느리' 김진순씨(왼쪽). 김씨는 제39회 어버이날을 맞아 국민포장을 받는다. /연합뉴스 “엄마와 혈액형이 다르지만 거부반응도 없었어요”부산 사상구에 사는 김진순(36.여)씨는 시어머니 오덕순(62.여)씨를...
친족 대부분 테러와 무관… 몇몇 아들은 함께 총 들어지난 2일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된 오사마 빈 라덴의 조카 와파 두푸르는 몇 년 전 남성잡지 'GQ'에 속옷 모델로 등장해 이름을 날렸다. 빈 라덴 형 바크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잘나가는 건설업자로 승승장구...
통합소비세(HST(의 운명을 판단하는 HST주민투표(HST Referendum)은 우편 발송 투표라는 다른 방식으로 오는 6월 중에 시행하게 된다. 정부는 우편 발송 투표제가 투표 비용을 낮출 수 있는...
“도입 충격 있지만 장기적 이익 있다” 정부 임명 독립 패널“도입 충격 지속돼 장기적 이익 없다” HST 반대 운동 진영 지난해 7월1일부터 BC주에 도입된 통합소비세(HST)로 인해 가구 당 세금부담이 연 350달러 늘어났다고 HST도입에 따른 효과를 검토한 민간 독립...
HST, 6월에 어떤 결정 내리시겠습니까?
③ “폐지하려면 시간과 비용 많이 듭니다”④ “보건 복지예산 어디서 걷습니까?”주정부가 간접적으로 밝힌 입장 HST에 대해 도입을 주도한 BC주 자유당(BC Liberal) 정부는 당연히 폐지를 원치 않고 있다는 신호를 여러 채널로 보내고 있다. 그러나 HST에 대해...
 1151  1152  1153  1154  1155  1156  1157  1158  1159  1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