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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비서실장의 사표(師表) 김정염 (2)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5-23 17:09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4)
김정염 대통령비서실장은 인재를 모으고 키워 국가 동량으로 배출했다. 행정부처의 유능한 엘리트들을 수석비서관, 비서관, 행정관 등으로 발탁했다. 대통령비서실 근무를 통하여 국정에 대한 종합적 안목과 정무적인 판단 능력, 정책추진 능력 등을 배양토록 했다.

매년 총무처로부터 고시 합격 신임 사무관들 중 성적순으로 10명씩 배정받아 2년 정도 비서실에서 근무케 함으로서 업무능력과 공직관, 국가관을 확립케 한 뒤 행정부처로 전출시켰다. 이렇게 훈련, 양성된 엘리트 관료들은 대통령비서실과 행정부서를 순환근무하면서 그 역량을 십분 발휘했고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그 중에서도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의 발탁은 자주국방 태세 강화를 위한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을 통한 국부 창출을 동시에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한 인사의 백미라 하겠다.

1968년 이후 가중되고 있는 북한의 전쟁 위협과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방위산업 육성이 긴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고 방위산업 건설을 독려했으나 방대한 재원조달과 기술 문제 등으로 그 진척이 여의치 못했다.

이때 오원철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가 김 실장에게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연계한 ‘병진건설’ 아이디어를 설명했고 두 사람은 곧 바로 박 대통령께 그 내용을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다음날인 1971년 11월 10일 오 차관보를 청와대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전격 임명하였고 이때부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연계 건설계획이 본격적으로 시동되었다. 대한민국의 명운을 가른 인사라 할 수 있다.

한편 김 실장은 대통령특별보좌관실을 신설하여 다음과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각계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비서실 업무와는 차원이 다른 특별보좌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문화특별보좌관 : 박종홍 서울대 교수 △외교 : 김용식 전 유엔대사, 최규하 전 외무장관, 김동조 전 외무장관 △안보 : 유재흥 전 국방장관, 서종철 전 국방장관, 박원근 예비
역 중장 △정치(국내·외) : 이용희 서울대 교수, 함병훈 연세대 교수, 김경원 고려대 교수, 장위돈 서울대 교수 △경제 : 남덕우 전 기획원 장관, 신병현 한국은행 총재, 박진환 서울대
교수, 김명윤 고려대 교수 △법률 :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 △사회 : 장동환 성균관대 교수, 임방현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렇듯 1970년대 대통령부(청와대)는 비서실과 특별보좌관실을 합쳐 대한민국의 인재풀 역할을 했다.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 국무총리, 감사원장, 경제부총리, 각 부처 장관 등 역대 정부까지 37명의 장관급 이상 공직자가 그 인재풀에서 배출됐다.

김정염실장은 사실상 '경제부통령'의 입장에 있었지만 행정부처와의 마찰이나 갈등 및 불협화음이 전혀 없었고 그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단 한 건의 불미스러운 일이나 말썽이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질책을 받을 만한 일에 대해서는 장관들을 대신하여 보고해 주면서 장관이 들어야 할 꾸중을 대신 들었고 칭찬받을 일에 대해서는 장관을 앞세워 보고케 하면서 장관들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는 스트레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힌바 있다.

“막중한 국정운영의 최종 책임을 맡은 대통령께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다. 대통령께서 장관들에게 일일이 꾸중을 하시거나 화를 내시지는 않는다. 그 대신 비서실장에게는 모든 스트레스를 풀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과 국정운영을 위해 바람직하다.”

김 실장은 1977~1978년 탈모와 좌골신경통 때문에 오래도록 고생했다. 샤워할 때마다 머리털이 한 줌씩 빠졌고 좌골신경통 때문에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보고를 받고 결재했다. 박 대통령의 호출 때에는 절뚝거리면서 집무실로 달려가곤 했다. 이 모든 신체적 장애가 스트레스 때문에 왔다는 진단이었다.

물리치료, 약물치료, 한방치료 등 여러 가지 치료와 노력을 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증세는 심해지면서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은 채 한결같은 자세로 비서실장 임무를 수행했다. 참으로 놀라운 정신력이었고 극기심의 발로였다. 그런데 이러한 증상들은 비서실장 퇴임 후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자 저절로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머리 좋기로 유명했다. 모든 계수는 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으며 박 대통령의 하문 시 주무장관보다 더 정확한 답변을 했다. 국정 전반에 관해 분야 별로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 박 대통령 보좌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가히 완벽한 비서실장이었다. 주요 전화번호도 모두 외우고 있었다. 1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이름을 거의 모두 기억해서 오랜만에 만나는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컴퓨터라는 별칭을 듣기도 했다.

그는 또한 극진한 효자였다. 매주 토요일 퇴근하면서 가회동 부모님 댁에 들려 문안드리는 것을 9년여 동안 한 번도 건너뛰는 일이 없었다. 충효동근(忠孝同根)임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대통령비서실 규모를 최소화 하고 능률을 최대화 했다. 9년여 비서실장 재임 중 비서실 규모를 총계 230명 내외로 운영했다. 이 중 운전수, 여직원 고용원(청소·정원관리) 등 기능직이 120명 선이고 행정요원 비서관, 수석비서관 등이 110명 선이었다. 특정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전문 인력으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부실기업 정리사업, 관광 진흥사업, 8·3 사체동결 조치 등이 그것이다.

'김정염 비서실'은 최소의 규모로 최대의 능률을 발휘하여 일을 가장 많이 한 대통령비서실이었다. 그는 최장수 최우수 완전 청결한 대통령비서실장의 모법이며 영원한 사표(師表)라고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역대 정권에서 보았던 대통령비서실의 과비대나 과직급 상향 현상과 가신그룹의 발호, 문고리 권력의 부패, 대통령 가족·친인척들의 부패와 국정 농단 왜곡 등 비정상적인 운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김 실장은 그의 건강에 대한 박 대통령의 특별배려에 따라 9년 3개월 동안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사임하고 일본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사 재임 중 1979년 10·26 박 대통령 서거의 비극을 맞이하였고 신군부에 의해 해임, 귀국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1993년 그는 세계은행이사회의 '동아시아로부터의 교훈'강좌에 초청받아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에 대하여 기조연설을 하고 질의 응답했다.

세계은행은 <한국 경제정책 30년사-김정염 회고록> 영문판을 세계은행 경제개발원 정책수립총서 창간호로 출판하여 개발도상국 경제개발 교과서로 활용했다.
 
이에 앞서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은 1992년 초 소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하여 한국 등 네 마리 용을 따라붙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국 경제개발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그의 회고록을 <한국 경제 발전-한강의 기적과 박 대통령>이라는 중국어판으로 번역 출간하여 공산당과 내각 및 국영기업체의 간부용 필독참고서로 활용했는데 김 실장은 한·중 우호증진을 위해 중국어판 회고록에 대한 인세를 사양했다.

이처럼 그는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해 헌신했고 박 대통령 서거 후에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 성공 노하우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의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개발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많은 개발도상국과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개혁개방을 하려는 나라들에게 경제개발 성공 노하우를 알리는 등대가 되고 있다.  
그는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뒤 박 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그동안 진전이 없었던 기념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박 대통령 기념도서관과 기념회관 건립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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