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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6-04 13:31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6)
박정희 시대에 이룬 성취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건설이다.

그것은 5000년 민족사상 가장 거창한 토목사업이며 외부 도움 없이 우리 자본과 기술, 그리고 우리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완성한 조국 근대화의 신작로이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건설의 발상은 1964년 12월 우리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얻기 위하여 서독을 방문했던 박 대통령이 에르하르트 총리로부터 고속도로 건설이 경제부흥에 미친 지대한 파급효과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듣고 강렬한 영감을 얻은 데서 비롯됐다.

박 대통령은 본-쾰른 간 왕복 40㎞의 아우토반을 주행하면서 경제학자이자 고속도로 전문가인 안내 의전장으로부터 고속도로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비용, 재원조달 방법, 필요장비, 동원인원 등 고속도로와 관련한 해박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주행 중 몇 번씩 정차하여 노면과 중앙분리대, 교차시설(인터체인지) 노선 등을 자세히 살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재정 규모나 기술 및 보유 장비에 비추어 고속도로 건설은 꿈일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 꿈을 간직한 채 실현의 시기를 주의 깊게 보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2차 5개년계획(1967년~1971년)이 조기 달성됨에 따라 물동량의 급증과 수출증대로 운송수요가 급팽창된다. △취약한 물류체계와 운송능력 부족은 경제성장에 큰 걸림돌이 된다. △기존 국토의 포장과 보수관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움으로 공로운송체계의 일대 혁신을 가져오는 고속도로의 건설이 불가피하다.

결국 박 대통령은 1967년 5월 2일, 제6대 대통령선거 기자회견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천, 강릉, 부산, 목포 간 고속도로건설 공약을 발표했다. 야당과 언론, 학자 지식인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김대중은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서울-강릉 간 동서 고속도로를 우선하여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만큼의 물동량이 없을 뿐 아니라 자가용을 가진 부유층들의 나들이 고속도로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국제유관기관들도 반대했고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는 개발도상국들이 경제적 타당성이나 기술력, 재원조달과 장비확보 등 자체능력과 여건을 넘어서서 고속도로, 종합제철 건설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냉소적으로 비판하기까지 했다.

당시 선진국 기준 고속도로 건설비는 차선과 노폭에 따라 1㎞당 6억~8억 원이었다. 이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경우 총 3400억여 원이 소요되는 것. 1967년 국가 총예산이 1643억원인 우리 재정형편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국제개발기금 등에서 장기 저리 차관을 얻고자 했으나 고속도로 건설의 타당성 검토에서부터 비토되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그 10분의 1인 330억 원의 최소비용을 책정하고 선 건설, 후 보완 원칙하에 1968년 2월 1일 서울 원지동에서 기공식을 거행했다. 선진국형의 완벽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면 돈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에 우선 우리 형편에 맞추어 건설하고 난 후 사용하면서 하자가 생길 경우 통행료 수입 내에서 보수해 나가면 될 것이라는 독창적 방식이었다.

박 대통령은 포병 출신으로 독도법에 정통했기에 평면지도를 보고도 입체적인 실제지형을 유추할 수 있었다. 경부간 노선구획을 박 대통령이 직접 했으며 토지매수도 10일 이내에 끝내도록 시·도지사들에게 전격적으로 지시하는 등 군사작전을 수행하듯이 했다. 이 과정에서 천안 부근 노선구획이 노출되어 어느 재력가가 그 부근 땅을 대량 매입한 사실이 알려졌고 박 대통령은 그 노선구획을 옮겨 다시 하기도 했다.

이한림 건설부 장관이 송 아무개 도로공사 사장과 장 아무개 주택공사 사장을 자기차에 태우고 건설현장 시찰을 가던 중 무슨 일로 기분이 상하여 두 사람을 자기 차에서 내리라고 호통을 쳤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송 사장은 장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빗속에서 내렸으나 혁명주체였던 장 사장은 못 내리겠다고 끝까지 버티면서 옥신각신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후 박 대통령은 2년여 동안 수많은 건설현장을 누비면서 독려와 점검, 지시와 제안들을 했다. 박 대통령의 얼굴이 햇볕에 새카맣게 탔을 정도였다. 청와대에 공사진척 상황판을 설치하고 수시로 도상점검을 했으며 고속도로망 구상도, 서울-부산 노선 확장도, 용지수매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지시 메모 및 스케치, 인터체인지 스케치,고속도로 밑 횡단농로 스케치 등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친필로 작성해 관계기관에 하달했다. 연도의 토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착근력이 강한 족제비싸리를 심으라는 지시와 그 스케치까지 작성해 내려 보냈다.

박 대통령은 공사감독 인력부족에 대하여 육군사관학교 출신 신임 장교와 ROTC출신 장교, 그리고 공과대학 토목과 출신들을 투입하여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철저한 공사 감독을 하도록 하였다. 민간업자들이 하기 어려운 난공사에 대해서는 군공병대를 동원하여 군대식으로 밀고 나가도록하여 공사비 절감과 공기단축 등의 효과를 기하는 한편 민과 군의 협력을 고취했다.

이에 발맞춰 건설사들도 회사 이익에 앞서 국가적 대사업을 차질 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연인원 900만 명과 165만 대의 장비 투입, 그리고 77명의 산업전사의 희생(금강휴게소 위령탑 건립)위에 최소의 비용(1㎞당 1억 원)과 최단 시일에 430㎞의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했다. 세계고속도로 건설사상 신기원을 이룬 것이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이룩한 불후의 작품이라 하겠다. 박 대통령은 추풍령에 세워진 경부고속도로 기념비에 ‘경부고속도로는 조국근대화의 길이며 조국통일의 길’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장차 있을 차선과 노폭 확장에 대비하여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용지 확보를 위한 접도구역 통제와 그린벨트 설치 등은 환경보호와 국토개발의 먼 앞날을 내다 본 박 대통령의 위대한 선경지명이었다.

'서울-부산 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작사, 작곡, 지휘로 이루어진 불멸의 걸작품'이라고 한국도로공사 간행물은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박 대통령은 호남, 남해안,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 고속도로를 1967년 5월 공약, 1968년 2월 착공 이래 1977년 말까지 10년 만에 완성하여 전국을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 중 중화학공업의 2대 핵심 사업은 포항 제철과 울산 석유화학단지 건설이었다. 문제는 2억 달러 가까운 소요자금의 조달이었다. 국제사회는 개발도상국의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부정, 반대하는 추세였으며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제차관단이 구성됐으나 그 진척이 지지부진했고 세계은행과 미국 수출입은행은 차관공여를 반대, 거부했다. 국제적 적정규모가 1000만 톤인데 비하여 우리나라가 추진하는 100만 톤 규모는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서였다. 소요 철강을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사다 쓰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핵심소재인 철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면 공업화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등의 육성발전에 큰 차질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차관선을 미국에서 일본으로 돌려 교섭하도록 했다. 한·일 양국 정부 간 교섭과 병행하여 박태준의 막후 정치적 교섭이 진행되었고 일본 자민당 실력자의 측면지원에 힘입어 청구권자금과 차관으로 제철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 타결했다.

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박태준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1970년 4월, 103톤 규모의 본 공장 건설이 착공되었다. 박태준은 직원들에 대한 훈시에서 청구권자금은 조상들의 피의 대가라고 전제하고 포항제철공장을 제대로 못 지을 경우 “우리 모두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라고 비장한 말을 하면서 독려했다. 시멘트 콘크리트 양생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할 경우 모두 뜯어내고 다시 시공토록 하는 등 철저한 감독을 했으며 직원들에게는 군대 이상으로 엄격한 업무처리를 요구했다.
 
드디어 1973년 1월 포항제철이 준공돼 첫 쇳물을 쏟아냈다. 3년 동안 고생했던 임직원들은 감격의 눈물과 함께 만세를 합창했다. 박 대통령은 포항제철에 대한 외부의 청탁, 간섭, 이권개입 등을 차단하기 위하여 박태준에게 '종이마패'를 써 주는 등 특별 경계를 했다. 박 회장은 포항제철 건설을 위해 혼신을 다해 헌신했으면서도 평생 동안 그 주식을 1주도 갖지 않았다.

이후 포항제철은 발전을 거듭하여 광양만에 제2 제철기지를 건설 확장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제철회사가 되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박태준은 포철주식을 출연하여 한국의 MIT를 겨냥한 포항공대를 설립했다. 박태준은 정치로부터 포항 제철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계에 입문하여 전두환, 노태우대통령때까지는 보호막 역할을 했으나 김영삼 대통령(YS) 시절부터 포항제철은 정치적 폭풍을 피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노태우대통령시절 3당 합당이 된 후 자질론을 들어 YS 대통령불가론을 주장했던 박회장은 YS가 대통령이 된 뒤 혹독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국내에 머물지도 못한 채 오랫동안 일본유랑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YS 가신들의 간섭과 영향이 횡행했다. 포항제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교포가 YS가신의 친구라는 이유로 자회사 사장이 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이명박 이상득 형제의 측근이 포철사장인선 면접을 보는 등 그 유린의 도가 극에 달했다. 그는 생전에 박 대통령이 마련해 주어 거주했던 집마저 사회에 기증했고 딸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공간을 신축하던 중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1992년 10월 3일 광양제철 건설을 끝낸 박회장은 박대통령 묘소를 찾아 제철산업건설의 임무완수 보고를 했다. 그 주요대목을 소개한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와 경제부흥을 위해서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하여 탄생하였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어제 포항, 광양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t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 장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충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임자 뒤에는 내가있어 소신껏 밀어붙여 봐."

-13차례에 걸쳐 건설현장을 찾아 지극한 관심과 격려를...중략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모래사장을 밟았을 때...중략. 연인원 4000만명이 땀 흘려 이룩한 포항제철은 이제 세계 3위의 거대철강기업으로 성장.... 그리고 우리나라는 세계 6대 철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위 내용 중 일부는 김정염 회고록 참조…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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