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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 든 36세 총리… 가난한 漁村을 强小國으로 키워

곽수근·정지섭 기자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5-03-23 17:00

리콴유의 '싱가포르 신화'
1965년 8월 9일, 말레이연방에서
축출되다시피 독립한 싱가포르의 앞날은 암담했다. 정정이 불안하고 가난한 섬은 곧 주변국에 흡수될 거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반세기 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가 넘는 아시아 최고의 부국이자 세계적인 물류·금융·비즈니스 중심지다.

◇빛처럼 영리했던 젊은 시절
리콴유는 영국 식민 시절인 1923년 9월 16일 부유한 중국 이민자 집 안에서 태어났다. 혁명가 쑨원·중국 지도자 덩샤오핑 등과 같은 객가인(客家人·중국 북부에서 남부·동남아로 이주한 한족) 출신이다. 빛(光)과 영리함(耀)이라는 의미가 깃든 이름을 얻은 소년은 명문 래플스 대학에 수석 입학했다.
이후 리콴유의 삶은 대학 시절 요동친다. 대공황 여파로 집안이 몰락하는 걸 지켜봤고, 학교에선 다른 인종 출신들과 물과 기름처럼 지내며 사회 부조리에 고민했다. 훗날 인생의 동반자로 해로한 두 살 연상의 아내 콰걱추(1920~2010)와 만난 곳도 래플스대였다.
◇식민지 시대에 배운 실용주의
1941년 12월 들이닥친 일본군에 동족 수천명이 살상당하자 리콴유는 ‘생존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굳혔다. 통치 이념이자 신념인 ‘실용주의’의 싹이 튼 것이다. 그는 고향을 짓밟은 일본군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먹고살아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고 1942년 일본어 강좌를 수강한다.
일본군 정보부에 취직해 연합군의 모스부호 해독 임무를 맡아 연일 들어오는 추축국 패전 소식에 새 세상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이 패퇴한 뒤에도 혼란이 가시지 않자 심란한 마음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에서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1950년 귀국해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각됐고, 1954년 실용주의 정당 ‘인민행동당’의 창립을 이끌며 사무총장에 올랐다. 5년 뒤 1959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은 51석 중 43석을 휩쓸며 압승했고, 서른여섯 살 리콴유는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됐다.

◇식민지 언어를 공용어로
1959년 영국에서 독립한 싱가포르의 상황은 위태위태했다. 국민투표를 통해 1963년 말레이연방 가입을 결정했으나 공업화 추구 노선이 말레이연방의 다른 구성원들과 충돌하며 2년 만에 쫓겨나듯 탈퇴했다. 리콴유가 당장 풀 문제는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등으로 엉킨 민족갈등이었다. 이를 풀 실마리는 ‘강력한 공용어’라고 보고, 그는 어느 민족의 모국어도 아닌 ‘식민지 언어’ 영어에 ‘제1 공용어’지위를 부여한다. 인구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계의 반발에도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과거의 어촌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하지만 ‘유교적 권위주의’만큼은
국가 운영 이념으로 극대화시켰다. 혹독한 법치와 반부패 제도를 확립해 거리에서 껌만 뱉어도 심하면 태형(笞刑)을 받을 수 있는 나라, 마약은 0.5g이상 가져도 사형당할 수 있는 나라로 바꿨다. 부패행위조사국(CPIB)으로 공직자를 밀착 감시했고, 1995년 가족이 사들인 주택 가격이 올라 논란이 일자 자신도 조사를 받았다.

리콴유는 강경 반공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온건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좌파와 연정을 꾸렸으며, 급진 공산주의에 맞서며 국익을 좇았다는 점에서 실용주의자로 부르는 게 타당하다. 독재 비판에 대해 “국민의 사랑을 받을지,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에 대해 나는 늘 후자(後者), 마키아벨리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언론자유보다 우선한 것은 국가 단합”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당이 정부이고 정부는 싱가포르”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등의 생전 발언은 국가 중심 노선에 대한 그의 확신을 보여준다. 하지만 1988년 내정간섭을 문제삼아 미국 외교관을 추방하는 등 비판을 용납 않는 통치 방식 때문에 ‘정치 후진국’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정치는 권위주의, 경제엔 자유
하지만 리콴유는 산업 분야에선 완벽한 자유를 부여했다. 해상 물류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극대화시켜 외국에 문호를 활짝 열었다. 다국적기업의 사업자 민원 처리속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세계 기업을 빨아들이기 위해 낮은 법인세율(17%)을 정착시켰고 양도소득세, 상속세는 아예 없다. 이
런 개방적인 경제정책 덕에 1만여 외국 기업과 세계 유수 은행 200여곳이 둥지를 틀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현실 안주”라며 국민을 독려해온 그는 31년 통치를 마감하고 1990년 퇴임한 뒤에도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정부 운영은 오케스트라 지휘와 같다. 유능한 팀 없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며 ‘악기’가 되어준 각료와 국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63년을 함께 산 반려자 콰걱추 여사와 2010년 사별한 뒤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혼수상태의 부인 옆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병간호를 해온 만큼 사별의 충격은 컸고, 5년 뒤 천상에서 재회하게 됐다.


<서른여섯 살이던 1959년 자치령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한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바닷가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리콴유는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사진=저서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문학사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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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의 '싱가포르 신화'
1965년 8월 9일, 말레이연방에서 축출되다시피 독립한 싱가포르의 앞날은 암담했다. 정정이 불안하고 가난한 섬은 곧 주변국에 흡수될 거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반세기 뒤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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