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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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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8-01-22 14:11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김춘희]

박 선생 어머니
 
                                                            김 춘 희
 
 
 거의 40년을 살았던 몬트리올을 떠나 밴쿠버로 완전히 이사 오기 까지 족히 3년은 걸렸으리라. 살던 집을 팔고 임시로 아파트에 살면서 일 년에 두세 번 밴쿠버 사는 아들 집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남편이 가고 난 빈 자리를 채우기에는 형제가 제일 편했던지라 걸핏하면 미국에 사는 동생들을 찾아가 몇 날 며칠씩 지내다 밴쿠버 아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013년 겨울이었다. LA 에서 밴쿠버로 떠나는 비행기 탑승시간은 넉넉했고 ...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편안한 모퉁이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마치 나의 독서를 방해라도 하려는 듯 내 앞으로 어떤 얌전하고 깔끔해 보이는 동양 할머니 한분이 자꾸만 왔다 갔다 하더니 손 전화로 누군가에게 좀 당혹한 어투로 말을 하는데 안 듣고 싶었으나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약간은 흥분된 어조로 이야기 하는 소리를 자연히 듣게 되었다.
 “가방이 도착하지 않았어. 분실 됐나 봐. 여기서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네가 대신 좀 말 해봐. 내 영어로는 똑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 몬트리올에서의 통역사의 본능적 직업의식이랄까, 아니면 나이 드신 분이 가방을 잃고 당혹 해 하는 어조에 내 양심은 나를 자꾸만 부추기며 “도와 드려야 한다” 라는 소리가 내 머리와 가슴에서 마치 꿀벌의 나래 짓처럼 윙윙 거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난 지금 여행 중이고 이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는데 아무도 나를 방해 할 순 없지. 난 모르는 일이야. 알아서들 하겠지.” 이런 생각이 교차 되었다. 그러나 곧 본능적으로 나는 읽던 책을 접고 할머니를 앉은 자세로 쳐다보았다. 할머니는 이 때다 싶었는지 “한국분이시죠?” 하고 반가워했다. 그리고 가방이 분실 된 경위를 또 늘어놓았다. 나는 이미 다 듣고 알고 있는데... 그래서 카운터로 가서 여행사 직원과 몇 마디 통역 해 드리고 안심시키고 나니 내 양심은 내게 “잘 했다” 하는 듯 했다. 할머니를 안심 시키고 난 후 나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할머니는 점심을 꼭 사 주고 싶다며 한사코 나를 데리고 커피 집으로 데리고 가서 케이크 하나를 시키고 함께 먹자고 하시는 게 아닌가! 난 할머니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 만큼 남편의 떠난 자리가 컸었고 더욱이 누구와 교재를 한다는 것은 더욱 싫었다. 적당히 잘 먹었다고 하고 볼일이 있다고 그 자리를 피했다.
 비행기 탑승을 하고 앉아서 생각 해 보니 내가 너무 쌀쌀 맞게 해 드린 것이 후회가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침 승무원이 점심을 시키라고 하며 지나가려고 하던 차에 그를 불러서 저 뒤에 한국 할머니에게 피자와 드링크를 내 대신 대접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도착 시간에 내리게 되었다.
 할머니는 딸이 너무나 바빠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기다리셔야 한단다. 나도 아들이 좀 늦는다고 해서 잠시 기다리는 중이었다. 할머니의 딸 자랑이 길었다. 내 딸이 E 대학을 나왔고(알고 보니 내 후배였다) 문인협회 회장을 했고(나도 글쓰기는 좋아하는데), 오케스트라 단장이고 (난 악기는 아니지만 성당 성가대에서 평생을 알토로 노랬는데) 등,등..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셔서 마지못해 드리고 헤어졌다. 딸이 꾀나 훌륭한 분인 것은 맞겠지만 다시 만나리라는 생각은 전연 하지 않았다. 여행의 목적은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고 도중에 만나는 인연은 그저 스치고 지날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할머니를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박 선생 어머니라며 따님과 함께 찾아오신다고!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과 인연을 맺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나에게는 좀 당혹한 만남이었는데... 박 선생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겸손하고 붙임성 있는 교양인이었다. 때마침 문인협회에서 신인 작품응모를 하던 때인지라 박 선생은 느닷없이 수필 두 세 개만 보내 달라고 했다. 수필은 칼럼 형식으로 오랜 동안 모 신문사에 기고했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후배의 선의에 감사한 맘으로 수필을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 한인 문인협회 밴쿠버 지부의 수필가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박 선생 어머니를 통한 교재는 이렇듯 나를 더 넓은 세계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 해 주었다. 만약 내가 그 때 통역관으로서의 직업의식만으로 누구를 통역 해 주는 일이 귀찮게 여겨져서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다면 지금의 문학적 교재를 어떻게 일구어 냈을까? 박 선생 어머니를 통한 문학적 교재를 통하여 나는 차츰 이 곳 밴쿠버 문인 사회에서 옛 아픔을 잊고 일어 설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박 선생 어머니는 이번에도 85세의 시니어답지 않은 건강한 모습으로 찾아오셨다. 오실 때 마다 큰 물건은 아니더라도 뭐든 챙겨 오신다. “이거 비산 거 아니야! LA 한인 타운 달라 가게에서 샀어!” 딸기처럼 예쁜 조막만한 것을 펴보니 쇼핑백으로 둔갑을 했다. 마치 봄 딸기의 향처럼 은은하고 잔잔하면서도 존경스러운 대 선배 박 선생 어머니다운 선물이었다. 나는 무엄하게도 어르신네에게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하고 싶다. 내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해 주시고 문협 회원의 길을 열어 주신 박 선생 어머님 고맙습니다. 봄 딸기 내음처럼 사랑스런 박 선생 어머니, 부디 만수무강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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