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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19-01-04 15:57

이영춘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흔들리는 바람의 가지 끝에서
셀로판지처럼 팔딱이는 가슴으로 편지를 쓴다
만국기 같은 수만 장의 편지를 쓰던 그 거리에서
다시 편지를 쓴다
그대와 나 골목 어귀에서 돌아서기 아쉬워
손가락 끝 온기가 다 식을 때까지
한 쪽으로 한 쪽으로만 기울던 어깨와 어깨 사이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
그림자처럼 길게 구부러지던 길모퉁이에서
뜨겁고 긴 겨울 편지를 쓴다
오늘은 폭설이 내리고 대문 밖에서 누군가 비질하는 소리
그 소리에 묻혀 아득히 멀어지다가 다가오는 소리
그대, 눈雪이 되어 눈발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소리
이 겨울 밤 내 창 문풍지 뜨겁게 흔들리는데
나는 그대의 언 땅에 편지를 쓴다
달빛 휘어진 어느 길모퉁이에서 헤어진
꽃잎 같은 사랑으로 꽃잎처럼 사라져간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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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림자 2020.06.15 (월)
강가에 쪼그려 앉아 물소리 듣는다은하에서 돌아 나와 강물 속에 이르는 길잠들지 못하는 물고기들이달꽃 흐르듯 물결 짓는다물고기 울음소리인가달빛 울음소리인가지느러미 파닥이는 소리에내 귀청 한 쪽이 무너진다강가에 쪼그려 앉아 나를 듣는다먼 길 돌아온 길, 돌아가야 할 길아득한 날개로 달에게 묻는다강물도 달빛도 말이 없다하얗게 부서지는 별 꽃처럼둥둥 홀로 떠가는 둥근 입술 하나신들이 놓고 간 죄의 씨앗 하나침묵의 신들이 하얗게...
이영춘
동화목(冬花木) 2020.03.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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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가을 철암역 2019.10.07 (월)
오후 세 시의 그 꼭지점에서햇살이 길게 모로 누우면철길 저 너머에서 세 시를 알리는 기차는푸우-푹-푸우-푹 흰 연기를 토하며 달려오고열세 살 그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혹 먼 이방의 한쪽 문을 그리워하듯산비탈 조그만 쪽문을 향해 아슬히 눈 멈추곤 했는데어느 날 도시락을 싸 들고 우리들 창자보다 긴 터널로 떠난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공복인 듯 탄가루 먹은 하늘은 검은 연기로 쏟아지는데전설처럼 푹푹 쏟아져 내리는데아버지...
이영춘
겨울 편지 2019.01.04 (금)
흔들리는 바람의 가지 끝에서셀로판지처럼 팔딱이는 가슴으로 편지를 쓴다만국기 같은 수만 장의 편지를 쓰던 그 거리에서다시 편지를 쓴다그대와 나 골목 어귀에서 돌아서기 아쉬워손가락 끝 온기가 다 식을 때까지한 쪽으로 한 쪽으로만 기울던 어깨와 어깨 사이그림자와 그림자 사이그림자처럼 길게 구부러지던 길모퉁이에서뜨겁고 긴 겨울 편지를 쓴다오늘은 폭설이 내리고 대문 밖에서 누군가 비질하는 소리그 소리에 묻혀 아득히 멀어지다가...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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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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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떡보 / 우주 한 채 2018.07.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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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 이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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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