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아시죠?

이정순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일주일 후면 마더스 데이에요.”
오늘 킨더가튼 선생님이 말했어요.
지니는 엄마한테 무슨 선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봤어요. 근데 걱정이에요. 지니한테는 돈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지난번에 제이슨이 가지고 있는 토마토 열쇠고리가 갖고 싶어 엄마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는데 주지 않았어요.
“제이슨, 토마토 열쇠고리 참 예쁘네. 네가 만든 거니?”
“응, 클레이교실에서 만들었어, 마더스 데이 때 엄마한테 선물할 거야.”
“나 한번 만져 보자.”
“안 돼! 망가져.”
그날 지니는 몹시 속이 상했었어요.
“엄마, 나 용돈 주세요.”
“우리 지니 왜 용돈이 필요할까?”
“나도 클레이교실 보내주세요.”
“우리 지니 클레이교실 다니고 싶니?”
엄마는 다음 달부터 보내준다고 했어요. 지니는 그만 후회가 됐어요. 그때 용돈을 받아두었으면 마더스 데이 선물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요.
“지니, 뭘 그리 생각하고 있어?”
“엄마, 돈이 없어도 선물 같은 거 할 수 있을까요?”
“왜? 누구 생일이니? 제이슨 생일은 8월인데 다른 남자 친구 생긴 거니?”
“엄마! 이제 제이슨하고 절대 안 놀아. 치사한 제이슨! 노나 봐라.”
“왜 싸웠니?”
엄마가 다정하게 묻는 바람에 그만 눈물이 찔끔 날 뻔했어요. 지니는 킨더가튼에서 제이슨이 토마토 클레이를 못 만지게 했다는 말을 엄마한테 다 말했어요.‘
“저런, 지니 속상했겠네. 그래서 클레이교실 보내 달라고 했구나.”
엄마는 요즈음 원고 쓰느라 바빠서 다음 주면 마더스 데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나 봐요.
“엄마, 어른한테 선물할 건데 돈 없으면 뭘 하면 돼요?”
“엄마 지금 바쁜데 나중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이번 주까지 원고 마감해야 해요. 아가씨!”
“치, 엄마는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서.”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어요.
“선물보다 방을 깨끗이 치운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드디어 내일이면 마더스 데이에요. 아직도 지니는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아, 맞다.’
지니는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어요.
“여보. 나 카디건 지난번에 커피 쏟은 것 세탁했소? 오월인데도 날씨가 제법 쌀쌀해요.”
“어머나. 미안해요. 여보!”
“엄마. 나 핑크 운동화 흙탕물에 빠진 것 씻었어요?”
“바쁘다, 바빠.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구나.”
‘좋았어. 내가 엄마를 도와드려야지.’
지니는 세탁실로 쪼르르 달려갔어요. 세탁 바구니에는 세탁물이 넘쳐났어요. 아빠의 카디건, 오빠의 하키복, 그리고 엄마가 좋아하는 베이지색 실크 블라우스……. 세탁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나 핑크 운동화. 지니는 세탁물을 세탁기에 한꺼번에 쑤셔 넣고 세제를 세 스푼이나 넣었어요. 많이 넣으면 더 깨끗할 테니까요.
‘그런데 무슨 버튼을 눌려야 하지. 에라, 모르겠다. 아무거나 눌러야지.’
세탁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서재에서는 컴퓨터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아요. 아빠는 오빠랑 쇼핑하러 몰에 갔어요.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낼 엄마한테 줄 카드를 만들었어요.
‘뭐라고 쓰지?’
지니는 스케치북을 잘라서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어요.
‘햐, 다 됐다. 오빠는 안 보여 줘야지. 비밀이야.’
지니는 서투른 한글로 삐뚤빼뚤 썼어요.
‘딩동댕! 세탁이 다 됐어요. 드라이어에 넣으세요.’
드디어 세탁이 다 됐어요. 지니는 드라이어에 세탁물을 넣어 온도조절기 버튼을 하이에 눌렀어요.
‘엄마가 무척 기뻐할 거야. 지니가 엄마 일 도왔으니까.’
“어머, 우리 지니 다 컸네. 엄마 일을 다 도와주고……”라고 하시면서 내 이마에 뽀뽀해 주시겠지. 히히.
지니는 낼 엄마한테 드릴 카드를 다시 꺼내 읽어 보았어요. 상상만 해도 마냥 즐거워 콧노래가 절로 나왔어요. 엄마가 서재에서 나오는 소리가 났어요. 지니는 텔레비전을 보는 척했어요.
“우리 지니 심심했지? 세탁기만 돌려놓고 엄마가 놀아 줄게. 세탁이 엄청 밀렸거든요. 아가씨!”
“괜찮아요. 나 심심하지 않아요.”
지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어요.
“우리 지니 기분 좋은 일 있나 보네.”
“응. 쬐끔……”
지니는 엄마 꽁무니를 잡고 세탁실로 쪼르르 따라갔어요.
“세탁물이 다 어디 갔지? 캭! 이게 뭐야?"
엄마가 드라이어 문을 열며 비명을 질렀어요.
‘히히, 그만한 일로 놀라시긴.’
“지, 지니야. 여. 여보! 당신이 세탁기 돌렸어요? 참, 내 정신 좀 봐. 쇼핑 갔지. 그럼 도대체 누가 세탁기를 돌렸어?”
‘히히. 엄마가 지난번에 이야기해 준 그 우렁이 각시가 그랬지.’
지니는 밤에 몰래 도와주는 우렁각시가 생각났어요.
‘그러고 보니 지니가 엄마 우렁각시네.’
“이걸 어째. 이걸 어째! 지니가 세탁기 만졌니? 아니지. 넌 세탁기 만지기엔 너무 어리지.”
“나 어리지 않는데……”
“캭! 세상에나, 이게 뭐야?”
엄마는 드라이어에서 옷을 꺼내며 소리를 질렀어요. 꺼낸 옷은 완전 쓰레기 같았어요. 엄마의 예쁜 블라우스는 쭈글쭈글 불도그 얼굴 같았고요. 아빠의 카디건은 늙은 불도그 얼굴 같았고요. 지니는 살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서 자는 척했어요. 지니가 봐도 옷이 다 망가진 것을 알 수 있었거든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하느님, 나 잘하려고 그랬어요. 엄마한테 야단맞지 않게 해주세요. 하느님은 제 마음 아시잖아요. 엄마가 집안일을 도우면 된다고 했어요.’
지니는 기도를 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어요.
 
얼마나 잤을까요. 맛있는 냄새가 솔솔 코를 간지럽혔어요.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지니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지니를 찾지 않았거든요.
‘엄마 아빠는 지니를 사랑하지도 않는 거야. 지난번에 아빠가 그랬잖아.’
“지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그렇지? 여보!”
“호호호!”
그래서 아빠는 오빠만 데리고 쇼핑을 하러 가고, 하키장도 아빠가 데려다주고요. 아빠는 한 번도 지니를 킨더가튼에 데려다준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도 바쁘다고 제이슨 엄마한테 킨더가튼 픽업을 부탁했고요.
“지니야. 밥 먹자. 아니, 애가 무슨 잠을 그리 많이 자. 나중에 깨면 먹여야겠네.”
그리고 이불을 도닥거려 주고 엄마는 그냥 나갔어요.
‘거봐요. 하느님! 우리 친엄마 아빠가 아니죠?’
지니 뱃속에서는 자꾸만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식탁에서는 아빠의 웃는 소리와 오빠가 떠드는 소리. 엄마의 즐거운 목소리가 났어요.
‘자기 식구들끼리 즐겁네. 나는 식구가 아니니까.’
지니 마음은 자꾸만 삐뚠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참으려고 해도 자꾸자꾸 눈물이 났어요.
“엉엉엉!”
“이게 무슨 소리야!”
“지니 우는 소리야. 엄마!”
엄마 아빠 오빠가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어요. 지니는 이불속에서 얼굴을 내밀지 않았어요.
“우리 지니, 어디 아프니?”
아빠가 지니 이마를 짚어보았어요. 지니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어요.
“열은 없는데. 우리 공주님 무서운 꿈을 꾸었나? 어디 보자.”
아빠가 달랑 안아 올리며 말했어요.
“에고, 우리 공주 이렇게 무거워졌어? 많이 컸네.”
지니는 잘못을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말하면 분명히 혼날 거잖아요.
“지니, 네가 엄마 도우려고 세탁기 돌렸구나?”
지니는 흠칫 놀랐어요. 엄마가 눈치를 챘나 봐요. 하지만 시치미를 떼야 해요.
“아니야. 내가 하지 않았어.”
“아, 우렁각시였구나?”
“응, 우렁각시? 으앙!”
그만 지니는 울음을 터뜨리고 울고 말았어요.
“나 엄마 도우려고 그랬단 말이야. 지니 주워왔으니까 엄마 도와줘도 기뻐하지 않잖아요.”
"어마나, 이게 무슨 소리야?"
"하하, 우리 공주님 꿈을 꿨구나. 우리 공주님은 가만있어도 착한데. 세탁기까지 돌렸으니 정말 착하지."
"정말? 지니는 착한 거지. 아빠!"
지니는 활짝 웃으며 아빠한테 안기며 물었어요.
“아빠, 아까 나 기도했어. 야단 안 맞게 해 달라고.”
“하하, 그 기도 하느님이 들어주셨니?”
“응!”
“들어 주시긴. 요 맹꽁아,”
“오빠! 나 우렁각시거든!”
“뭐? 우렁각시?”
“엄마, 요거.”
지니는 아까 만든 카드를 엄마한테 내밀었어요.
-엄마, 많이 사랑해요.
엄마 딸, 지니-
“아, 내일이 마더스 데이구나?”
엄마는 이제야 생각 났나 봐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