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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일기] 내 손주만 30명··· 5월이 되니 어머니가 그립다

밴조선에디터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05-17 12:38

[아무튼, 주말]

일러스트= 김영석
내 부친은 좀 보태서 말하면 신화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추상적이고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편이었다. 신체적 건강은 몹시 허약했다. 그와 반대로 모친은 100% 현실적이어서 일을 좋아했고 드물게 보는 건강 체질이었다. 육남매 중 나만이 왜소하고 병약하게 태어났다.

집에 손님이 오면 모친은 언제나 "우리 큰아들은 나를 닮았으면 키도 크고 건강했을 텐데, 아버지를 닮아서 저렇다"고 불만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50을 넘기면서부터는 건강도 정상화되고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더 많이 했다. 모친은 그것을 확인한 뒤부터는 "우리 큰아들은 키도 작고 약해 보이지만 나를 닮아서 건강은 해요. 아파서 눕는 일도 없고…"라면서 말을 바꾸곤 했다. 사실이 그렇기도 하지만 자녀들의 좋은 점은 자기를 닮았다는 생각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90세가 넘은 후에는 고향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 100세까지 사셔야 고향에 가실 테니까 오래 사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싫다. 그렇게 오래 고생할 생각은 없다. 내 나이가 돼 봐라. 하루하루가 힘들고 자녀들에게 짐이 될 것 같아 걱정이란다. 90까지 살았으면 감사하지"라고 말했다.

그러다가도 손주들이 핑크빛 도는 재킷이나 예쁜 바지라도 사다 주면 반갑게 받으면서 "고맙다. 이것들은 간직해 두었다가 이다음에 입으련다"고 했다. 애들이 "할머니 그때는 새롭고 더 좋은 것이 생길 테니까 입으세요"라고 해도 "지금 입는 것이 아까워서 그런다. 물건은 쓸 수 있을 때까지는 버리지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애들이 "할머니는 200세까지 살고 싶은 모양"이라고 하면 모친은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이야 있나?" 하면서 환하게 웃곤 했다.

장수가 신체적으로는 부담스럽다. 그래도 오래 살고 싶은 본능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 삶을 이어가는 것 같다.

내가 애들 여섯을 키우면서 고생하는 것이 어머니는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걱정하지 마라. 사람은 누구나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면 자기가 먹을 것은 다 타고나는 법이란다"고 위로해 주었다. 지금은 애들 여섯의 가족이 모두 제 구실을 하고 있다. 슬하의 가족을 합치면 30명이 넘는다. 한국과 미국에 살고 있다. 의사, 교수, 법조인 등만 17명이 된다. 모두 사회에 작은 봉사라도 하는 셈이다. 어머니의 교훈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경제 이론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뜰 안에 암탉이 병아리들을 몰고 다녔다. 모친은 모이를 주면서 "많이 먹고 빨리 커라" 했다. 내가 "빨리 크면 뭐 하시게요?" 했더니, 그래야 너희들이 고기도 먹고 달걀을 받을 것 아니냐?"면서 자연스레 웃곤 했다.

그 어머니가 77년 동안 나를 극진히 위해주다가 떠나갔다. 그 사랑의 씨앗이 내가 되었고, 나는 그 사랑을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면서 살아왔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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