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영회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84층 LG증권 사무실에서 회의 도중

2001년 9월 11일 오전 6시30분,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시. LG증권 뉴욕법인 차장 이동훈(李東勳)씨는 출근하기 위해 자택을 나섰다. 늘 그랬던 것처럼 기차를 타고 뉴어크(Newark)공항에 가서 맨해튼행(行) 지하철로 갈아탔다. 뉴욕 맨해튼 월드트레이드센터(WTC) 전철역에 도착한 시각은 7시50분쯤.

이씨가 매일 장거리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던 까닭은 부인(최승은)의 직장 존슨앤존슨 본사가 프린스턴에 있었기 때문. 두 살짜리 아들과 8개월 된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아내의 직장과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야 했다. 이동훈 차장은 지하철역에서 나와 지하광장을 지나 '원 월드(1 World)'로 갔다.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은 노스(north)타워와 사우스(South)타워. 맨해튼에서는 통상 노스타워를 '원 월드', 사우스타워를 '투 월드'로 부른다. 이 차장은 '원 월드' 1층 로비에서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78층까지 올라간 뒤 승강기를 갈아타고 84층 사무실로 갔다.

LG증권 직원은 본사 파견 직원 6명, 현지채용 직원 6명 등 모두 12명. 이 차장이 자리에 앉은 것은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이 차장은 미국 주식·채권 운용 책임자였기 때문에 뉴욕증시가 개장하는 9시 전까지 준비를 마쳐야 했다.

이 차장과 팀원 2명이 먼저 출근한 상태였다. 전날 저녁, WTC 안에 있는 증권사 법인장과 직원들이 전직 경제부총리와 회식이 있었지만 이 차장은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차장은 이동영씨, 제니퍼 최와 함께 CNN, 블룸버그, 로이터 등을 체크하며 회의 자료를 준비했다. 8시30분, 그는 트레이딩룸(trading room)에서 아침회의를 주재했다. 직원들은 각자 확인한 뉴스를 토대로 9월 11일의 뉴욕증시 상황을 전망했다. 이 차장은 의자를 뒤로 젖힌 채 편안한 자세로 직원들 얘기를 듣고 있었다.

LG증권 뉴욕법인은 84층 모서리에 있어 전망이 환상적이다. 회의실 창밖으로 뉴욕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원 월드’에는 한국 회사가 3~4개 들어와 있다. 현대증권 뉴욕법인이 78층, 한투증권이 20층에 있다. 84층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헬리콥터나 경비행기가 저 아래에서 날아가곤 했다. 가끔씩 뭉게구름이 아래쪽에 걸려 있을 때도 있다.

아침회의를 시작한 지 10분쯤 흘렀을 때였다. 어마어마한 충격과 함께 폭발음이 났다. 이 차장은 순간 의자와 함께 뒤로 ‘콰당’ 넘어갔다. 뒷머리의 통증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세계사를 바꾼 9·11 테러는 이렇게 찾아왔다.


"우리가 저기쯤인데…"

현재 이동훈(41)씨는 로열캐나다은행 홍콩지점 상무로 있다. 부인 최승은(40)씨가 최근 존슨앤존슨 한국지사장으로 임명돼 한국 근무를 하는 까닭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 2주일 한 번꼴로 서울에 온다. 지난 8월 17일 일요일 오후 기자는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이 상무를 만났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그날의 상황을 3시간 가량 이야기했다.

처음 충격을 받고 넘어졌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 "지진 아니면 지하 쇼핑몰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지하 몰에서의 폭탄테러는 그 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그래서 직원에게 911로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불통이었다. 사무실 천장은 3분의 1쯤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복도로 통하는 회사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커먼 구름이 들어왔다. 직원들에게 문틈을 막으라고 말하고 TV를 켰다. TV에선 월드트레이드센터에 경비행기가 실수로 부딪혔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TV 화면을 보고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저기쯤인데'라고 소리쳤다. 처음엔 소방관이 올 때까지 기다릴까 생각했다."

언제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했나.
"사무실에서 중계되고 있는 TV 화면을 보니까 비행기에 의해 뚫린 구멍이 너무 커 보였다. 빌딩이 금방이라도 뚝 하고 끊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또 언제 소방관이 올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물수건을 만들어 혼자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홀에 있는 첫 번째 비상구 문을 열었다. 시커먼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허겁지겁 문을 닫고 두 번째 비상구로 달려갔다. 비상구 문을 여니 맑은 공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 직원들을 데리고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이젠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단을 따라 1층까지 내려온 건가.
"아니다. 78층까지 내려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78층에서는 빌딩 시스템이 달라 비상계단을 갈아타야 했다. 문제는 78층 계단의 방화문이 열리지 않았다. 충격에 문이 틀어져버렸다. 난감했다. 불안이 엄습해왔다. 당황해 하고 있을 때 79층에서 '컴 오버 히어(Come over here)'하는 소리가 들렸다. 79층으로 올라가니 복도가 엉망이었다. 190㎝가 넘어 보이는 건장한 흑인이 소방호스로 불을 끄고 있었다. 그가 소방호스로 만들어준 길을 따라 나와 이동영씨, 제니퍼 최씨가 함께 움직였다. 우리는 다른 비상구로 내려가 78층에서 비상구를 갈아탈 수 있었다. 내려가면서 휴대폰으로 아내와 한국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시도했는데 신호가 가지 않았다."


바위처럼 쫓아온 시커먼 구름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사람이 많았나.
"많았다. 55층까지는 내려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55층에 이르니 계단실에 사람들이 꽉 밀려있었다. 그렇지만 질서가 있어 차분했다. 계단 한 칸에 두 사람씩 서고 한 줄은 비워놓은 채 내려가고 있었다. 비워놓은 줄로는 노약자, 부상자, 부녀자 등이 빨리 내려갈 수 있었다. 이러다보니 한 층을 내려가는 데 5분 정도 걸렸다."

소방관을 처음 만난 것은 몇 층인가.
"40층 정도 되었을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가고 있는데 밑에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방관들은 산소통, 도끼 등 무거운 장비를 메고 계단을 올라오느라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그들은 모자를 벗고 가슴을 풀어헤친 상태였다. 그들이 막힌 비상구를 깨고 열어줬다."

그 이후엔 소방관을 언제 만났나.
"한참을 내려가는데 또 박수가 터졌다. 소방관 7~8명이 또 올라왔다. 그리고 2~3층 뒤처져서 앳돼 보이는 소방관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쳤고 나도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는 너무나 힘들어하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소방관이 된 신참 같았다. 이런 비상 상황이 아니면 도저히 투입되지 않았을 그런 앳된 소방관이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쟤가 90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하고 걱정했다. 그 뒤 3개월 이상 꿈에서 그 소방관의 눈빛을 보곤 했다. 그때마다 잠에서 깼다. 죽으러 올라가는 사람을 향해 박수를 쳤다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40층에서 1층 로비까지 내려올 때는 큰 문제가 없었나.
"내려가다 보니까 23층 복도에 비상응급실이 설치된 것이 보였다. 소방관이 계단실 입구에서 두 줄로 줄지어 내려가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퍼스트 에이드(first aid) 라이선스!' 응급치료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찾는 소리였다. 어떤 40대 백인 여성이 손을 들고 23층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1층 로비에 내려갔을 때의 상황은 어땠나.
"1층 로비는 엉망이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현관문은 잠겨있었다. 로비에 있는 경찰들은 계단을 타고 내려온 사람을 지하 몰(mall)로 인도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뭔가 계속해서 퍽퍽퍽퍽 떨어졌다. 시커먼 모습이라 무슨 잔해인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게 사람들이 고층에서 떨어지며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하 몰의 상황은 어땠나.
"지하 몰은 반대편의 다른 빌딩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들은 안내에 따라 맞은편에 있는 '6 월드'를 향해 걷고 있었다. 쇼핑몰 내부는 내가 잘 아는 곳이다. 150m 정도만 걸으면 '6 월드'에 다다를 수 있었다. 15~20m쯤 걷고 있을 때였다. 쿠르릉 하는 엄청난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런(run·달려라)'하고 외쳤다.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시커먼 구름 덩어리가 몰을 가득 채우며 쫓아오고 있었다. 공기, 열기, 잔해 등이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아 뿜어져 나왔다. 그 속에서 사람들이 튕겨져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방향이 꺾이는 모서리 쪽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렸지만, 곧 몸이 붕 떠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언제 정신을 차렸나.
"얼마쯤 지났을 때 엎어진 자세로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여기가 죽으면 오는 데구나. 내가 지금 죽은 거구나.' 한동안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 손발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랜턴 불빛이 줄지어 보였다. 소방관들이었다. 먼지층이 두터우니까 마치 랜턴 불빛이 반딧불처럼 점점이 반짝거렸다. 불빛은 채 1m 도 밝히지 못했다."

이 상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조금 후에 그는 “이때부터 나는 완전한 공황(恐慌) 상태에 빠져서 오로지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때 어떤 소방관이 ‘혼자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옆 사람 손을 잡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내 옆에는 제니퍼 최가 있었다. 이동영씨는 보이지 않았다. 소방관 1명에 5~6명씩 손을 잡고 걸었다. 잔해를 헤치면서 걷다 보니 눈에 익은 잡화점 간판이 보였다. 그렇다면 ‘6 월드’까지는 100m 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6 월드’를 향해 걷는데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비치고 있었다. 누군가 몰을 덮고 있는 지상에 구멍을 뚫어 사다리를 내려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비로소 지상으로 나갔다. 우리를 안내해준 소방관은 다시 사다리를 타고 안으로 내려갔다.”

바깥 상황은 어땠나.
"텔레비전과 사진에서 본 그대로다. 분진에 뒤덮여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떤 소방관이 물을 뿌려줘 일단 눈부터 씻었다.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또다시 쿠르릉 굉음이 들렸다. 방금 전까지 내가 근무하던 노스타워가 무너지고 있었다. 제니퍼와 함께 정신없이 뛰었다."

그는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얼마인가 정신없이 달렸다. 14가(街) 유니온스 광장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이젠 살았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마침 W호텔이 보여 그는 분진을 뒤집어쓴 채로 호텔로 들어갔다. 직원 휴게실에서 숨을 돌리면서 호텔 측에서 준 옷으로 갈아입고는 호텔 전화를 이용해 서울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친은 서울시장과 총무처장관을 지낸 이상배(李相培) 한나라당 의원이다.

부친이 무슨 말을 하시던가.
"아버지께선 '괜찮냐,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곤 흐느끼셨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께서 집사람에게도 연락하신다고 했다."

그 뒤 어떻게 했나. “호텔서 나와 40~50가(街)로 다시 걸어갔다. 그쪽에 한국증권사 사무실이 여러 곳 있었다. 아는 분의 차를 얻어 타고 뉴저지로 가는 조지워싱턴교를 넘어가는데 길이 너무 막혔다. 평소 20~30분이면 가는 거리가 4시간 넘게 걸렸다. 뉴저지주의 포틀리 한인타운에 있는 한인식당에 갔다. 그곳에서 LG증권 법인장과 만났다. 이미 국내 언론사들은 법인장님에게 연락을 취한 상태였다. 나는 그곳에서 여러 한국 언론사의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한인식당에서 나와서 집에 도착한 게 새벽 5시쯤이었다.”

그런 충격을 받으면 오래 간다는데, 어떻게 후유증을 극복했나. 
"살았다는 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잠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살아서 감사하다는 생각보다는 (죽은 사람들에 대해) 미안하고 슬픈 마음이 솟구쳤다. 3일 뒤 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는 내게 재난사고를 겪고 난 뒤에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의사는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3개월 동안 통원치료를 받았다."

오랫동안 잠을 못 잤다고 했는데.
"꿈에서 세 사람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만난 어린 소방관과 사다리를 다시 타고 지하몰로 들어간 소방관, 23층에서 응급치료 자원봉사를 지원한 백인 여성이었다. 죽으러 올라가는 소방관에게 박수를 쳐서 올려 보냈다는 죄책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응급치료 봉사를 자원한 그 백인 여성은 55층부터 함께 계단을 내려온 사람이었다. 자격증이 없어도 도와줄 수 있었는데, 그 여성의 얼굴이 떠올라 살아있는 게 미안했다."

이 차장은 2002년 10월, 뉴욕을 떠나 홍콩으로 갔다. BNP 파리바은행 홍콩지점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후 도이치방크를 거쳐 로열캐나다은행 홍콩지점 상무로 있다.
 
회사를 옮긴 배경에 9ㆍ11을 잊고 싶다는 심리가 영향을 준 건 아닌가.
"그렇다. 처음 3개월 동안 나는 '옛날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안돼 환경을 바꿔보고 싶었다."

9ㆍ11은 세계사(史)를 바꿔놓았다고 한다. 인생관에도 9ㆍ11이 큰 변화를 주었을 텐데.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슬람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게 왜 이런 피해를 주느냐고 화를 내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슬람 입장을 이해하는 쪽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느꼈다. 다원적 가치에 대한 이해심이 커졌다. 그전까지는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후 관용적인 마음이 생겼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쯤 있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구체적인 삶의 태도에서는 어떤가.
"세계무역센터는 화이트칼라들이라면 한번쯤 근무했으면 하고 바라던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나고 부자고 권력이 있어도 미래에 어떤 상황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나도 큰 꿈이 있었다. 하지만 아등바등 살면서 꿈을 이룬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의 눈치 안 보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후 골프를 끊었고 출장도 주말에는 가지 않겠다고 회사에 얘기했다. 즐길 수 있을 때 가족과 즐기며 사는 게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동훈
1967년생. 연세대 중문과 졸업. 1992년 대한항공 입사. 펜실베이니아대학 워튼스쿨 MBA. 1995년 LG증권 근무. 1999년 LG증권 뉴욕법인 근무. BNP파리바은행·도이치방크 거쳐 현 로열캐나다은행 홍콩지점 상무

조성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