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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같은 정치 인생 - 조 바이든은 누구인가

뉴욕=정시행 특파원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11-07 08:59

30세 최연소 의원 ‘엉클 조’, 78세에 최고령 대통령
조 바이든(77) 전 부통령은 30세에 최연소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이후 최고령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반세기 동안 워싱턴 정치권 주류를 대표해왔다. 동시에 서민과 노동자에게 ‘이웃집 조 아저씨(Uncle Joe)’로 불릴 정도로 대중적이고 친근한 면모를 갖춘, 보기 드문 유형의 정치인이다.

펜실베이니아의 서민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조 바이든(오른쪽에서 두번째)  /바이든 홈페이지
펜실베이니아의 서민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조 바이든(오른쪽에서 두번째) /바이든 홈페이지

바이든은 1942년 11월 20일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아일랜드계·가톨릭 가정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화로 청소와 중고차 중개업을 전전했고, 어려운 생활로 처가의 도움을 받았다. 바이든은 10세 때 부모와 델라웨어로 이주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 모두를 정치적 고향으로 여기고, 중서부 블루칼라(노동자)를 자기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더듬증이 심해 또래의 따돌림을 받고 주먹다짐도 했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가 ‘네 앞서가는 생각을 말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위로해주셨다”고 말한 적 있다.

델라웨어대에 재학 중이던 바이든. /바이든 홈페이지
델라웨어대에 재학 중이던 바이든. /바이든 홈페이지

그는 델라웨어대를 거쳐 시러큐스대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로스쿨 졸업 성적은 85명 중 76등이었다. 또 천식이 심해 군 징집이 면제됐다. 24세엔 첫사랑 대학 동창과 결혼해 세 자녀를 뒀다. 29세이던 1972년 델라웨어의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 당시 공화당의 현역 거물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처음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바이든의 그때 그시절 - 젊은 시절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 그는 상원 의원을 지낸 36년간 자택이 있는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워싱턴DC 의사당까지 왕복 4시간씩 기차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바이든은 이번 대선 때도 기차를 타고 경합주들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바이든 캠프는 “스크랜턴(바이든 고향)에서 윌밍턴, 그리고 백악관까지 그는 수천 번의 기차를 탔다”고 했다. /바이든 캠프 공식 웹사이트
바이든의 그때 그시절 - 젊은 시절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 그는 상원 의원을 지낸 36년간 자택이 있는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워싱턴DC 의사당까지 왕복 4시간씩 기차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바이든은 이번 대선 때도 기차를 타고 경합주들을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바이든 캠프는 “스크랜턴(바이든 고향)에서 윌밍턴, 그리고 백악관까지 그는 수천 번의 기차를 탔다”고 했다. /바이든 캠프 공식 웹사이트

그러나 선거 6주 뒤 교통사고로 아내와 돌배기 막내딸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두 살·세 살 된 두 아들도 뇌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절망 속에서 의원직을 포기하려던 그는 아이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울면서 취임 선서를 했다. 이후 수십 년간 그는 델라웨어의 자택과 워싱턴 의사당까지 매일 암트랙 기차로 왕복 4시간 통근을 했다.

조 바이든이 상원의원 당선 직후 교통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은 뒤, 1973년 두 아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의원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누워있는 아이가 장남 보로, 그 역시 2015년 암으로 사망했다.
조 바이든이 상원의원 당선 직후 교통사고로 부인과 딸을 잃은 뒤, 1973년 두 아들이 입원한 병실에서 의원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누워있는 아이가 장남 보로, 그 역시 2015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남 보는 델라웨어주 법무장관까지 지내며 그의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2015년 45세에 뇌종양으로 숨졌다.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은 이 충격으로 2016년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남은 아들이 차남 헌터(50)다. 아버지와 형의 그늘에서 방황한 헌터는 미망인인 형수와 동거하고 마약에 중독되는 등 복잡한 사생활로 구설을 낳았다. 헌터가 아버지 직위를 이용해 국내외 사업을 했다는 의혹은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진영의 최대 공격 소재가 됐다.

비극적 가정사는 역설적으로 바이든에게 정치적으로는 득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가 상원의원만 내리 6선(選)을 한 데는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연민의 감정이 깔려 있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국은 50년간 바이든이 슬픔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다.

1977년 재혼한 질 바이든과,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찍은 모습. /바이든 홈페이지
1977년 재혼한 질 바이든과,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들을 찍은 모습. /바이든 홈페이지

이번 대선에서도 바이든은 “코로나로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의료비 폭탄을 맞게 된 서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이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바이든의 36년 의정 생활에 대한 평가는 공화당과 초당적 협력에 힘썼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상원 법사위원장과 외교위원장을 지내면서 협상의 달인이라 불렸고, 보수 인사들과도 두루 친하다.

2008년 대선에서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러닝메이트가 돼 부통령이 된 조 바이든.
2008년 대선에서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러닝메이트가 돼 부통령이 된 조 바이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8년 대선 출마 당시 보수적인 연장자 바이든을 러닝메이트로 삼은 것도, 자신에게 부족한 그의 경륜과 협상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내가 바이든을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그가 늘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각을 말할 수 있게 독려하고 어떤 사안의 복잡한 측면을 모두 살펴본다는 점”이라고 했다.



바이든은 특정 이념보다 당대의 여론과 현실에 충실히 따르는 중도 실용주의에 가깝다는 평가다. 1990년대 걸프전에 반대했으나 2000년대 9·11 테러 뒤 이라크전엔 찬성한 식이다. 1970년대 인종 통합 정책에 반대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됐으나, 2010년대 동성 간 결혼은 오바마 대통령보다 먼저 지지했다. 또 부통령 시절 시진핑 주석과 단독 만찬만 8차례 하며 ‘최고의 중국통’으로 불렸으나, 이번 대선에선 반중(反中)을 내세웠다.
2015년 장남의 장례식에서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바이든을 위로하고 있다.
2015년 장남의 장례식에서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바이든을 위로하고 있다.
조 바이든 부통령이 퇴임을 앞둔 2017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시민 최고 훈장인 '자유 메달'을 받으며 눈물 흘리고 있다. 두 사람은 8년간 끈끈한 브로맨스를 자랑했다.
조 바이든 부통령이 퇴임을 앞둔 2017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시민 최고 훈장인 '자유 메달'을 받으며 눈물 흘리고 있다. 두 사람은 8년간 끈끈한 브로맨스를 자랑했다.

바이든의 대선 도전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1988년엔 연설 표절 의혹으로 사퇴했고, 2008년엔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오바마에게 밀렸다. 생애 마지막 도전인 2020년 대선에선 트럼프 정권의 분열과 혼란 속에서 미국인이 갈망한 경륜과 안정, 친화력 같은 자신의 모든 자산을 쏟아부었다.

두 번째 아내이자 델라웨어대 영어과 교수인 질 바이든(68)과는 1977년 재혼했으며, 슬하에 사회복지사인 딸 애슐리(39)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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