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9

김춘희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0-11-09 08:33

코스모스9

김춘희 |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자고 일어나면 수북이 쌓여서 ‘읽어 주세요’ 라며 나를 기다리는 그 많은 카톡 메시지가 요즘은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지난 3월에 오랜만에 한국방문 비행기 표를 사 놓고 한국 가면 이번엔 꼭 고교 동창들을 만나 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밴쿠버에 사는 친구의 안내와 배려로 접속되어 고교 동창 카톡방에 발을 딛게 되었다. 서울 사대부고 9회 여자 동창 방이다. 한국 전쟁 후 우리 대부분은 부산 피난 당시에 남녀 공학인 사대 부중에 특차로 들어갔고 1957년에 고교를 졸업했다. 그 후 우리들은 자신의일생을 살아가느라 동창을 찾아가며 한가히 살지 못했다. 여자 카톡방 접속자는 모두 46명이 모였다. 물론 국제적인 네트워크다. 대부분 프로파일 사진을 올렸으므로 내가 친구 얼굴을 보고 싶으면 사진을 열어 보지만 63년이란 긴 세월을 살면서 그 옛날 앳된 모습은 사라지고 알아 볼 수 없도록 우리는 변해 있었다. 다만 개성이 강한 얼굴이라던가 나와 같은 줄에 앉았던 꼬마 친구들만 겨우 알아 볼 정도다. 친구가 그리워 보고 싶을 때는 이민 생활을 하면서도 보물처럼싸 들고 다니는 고교 앨범을 찾아 얼굴 대조를 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거의 10년에 한번 정도 고국 방문을 했다. 그러나 방문 때마다 볼일이 끝나면 황급히 일정을 마치고 다시 케나다로 돌아 와야 했기에 친구들을 찾아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늘 가족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주부라는 소임 때문에 나의 모국 방문은 무척 사무적이고 가족 위주의 방문으로 끝나곤 했다.

우리들 카톡방 이름은 코스모스9 이다. 그 의미는 사대부고의 교화(校花)가 코스모스였고, 9는 1957년 졸업한 9회 졸업생을 뜻하여 코스모스9라 명칭 했다 한다.

이 방의 주인들은 모두 80을 훌쩍 넘긴 할머니들이다. 이제는 아내의 역할, 엄마의 소임을 다 끝내고 자유로운 친구들이 많다. 아직도 아내의 소임을 살고 있는 운 좋은 친구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신상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기회가 되어 자기소개를 꼭 해야 하는 경우를 빼 놓고는 말이다. 적어도 그 방에서는 말없이 이루어지는 묵게 같은 것들이 있다. 자식자랑, 남편자랑, 그런 지극히 평범한 자랑들을 하지 않는다. 누가 남편 자랑, 자식 자랑을 한다면 그 친구는 벽에다 대고 말하듯 공허 할 것이다. 또한 보통 시니어들이 모이면 자기 병 자랑이 많은데 이 방에서는 그런 자랑도 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는 소박한 방이다. 또 우리는 종교, 정치 같은 머리 아픈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다. 종교는 이미 인생을 살 만큼 산 사람들이라 자기 것을 고집하지도 않고 정치 이야기도 이미 우리 손에서 떠나 물 건너 간이야기다. 평범한 일상을 초월한 듯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편하다. 사랑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나이지 않은가. 타임머신을 타고 1950년대로 돌아간 듯 그저 반갑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만이 허락된 방이다.

며칠 전에 한 친구가 서울에 사는 친구들 모임에서 찍었던 단체 사진을 올렸다. 알아 맞혀 보란다. 내게는 80을 넘긴 할머니들의 얼굴이 모두 한 형제처럼 비슷비슷하고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우리들 나이에는 모두 얼굴 모양이 같아지는가 보다. 학창시절에 공부 잘하고 잘 생겼던 친구나 밤낮 꼴찌만 면하던 친구나 키가 컸거나 작았거나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는모두 비슷비슷 해 졌다. 영혼이 천국을 가면 그렇게 비슷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천국에 가까이 살고 있는 셈이다.

정확히 17년이나 18년만 더 살면 모두 100세가 된다. 놀랍지 않은가! 백세를 향한 시니어들이 노는 모습은 고교 시절 그대로다. 밤새 수북히 카톡방을 가득 채운 친구들의 안부와 축복의 문자, 각양 각종의 동영상, 건강 정보, 오락, 음악 등 ... 나는 집안에 편히 앉아서 강도 높은 교양 강좌를 듣거나 음악 감상, 미술 관람 등을 골라 열어 보며 즐긴다. 코로나로 집콕하는 우리시니어들에게 안성맞춤의 최상의 엔터테인을 누리고 산다.

내가 이 방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다. 우리는 결혼하고 나이 들어 살면서 친구들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않으며 살아 왔다. 내 이름은 없어지고 남편의 성을 따서 미세스 누구, 또는 아이의 이름으로 대신 불렸다. 사회적으로 활동을 한 사람이면 선생님, 여사님, 권사님, 회장님, 등으로 불렸다. 누가 언제 우리들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었던가? 형제들도 이름 대신 누구 엄마야 라고부르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코스모스9방에서는 옛날 고교 시절로 돌아가서 아무개야! 하고 야 를 붙여 부른다. 반세기를 넘게 살면서 사라졌던 나의 호칭, 아무개야! 우리들은 지금 1950년대로 돌아 가 살고 있다.

80년 이상을 부려먹은 몸에도 마음에도 이제는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할 시간이 왔다. 코스모스9의 희망은 만남이다. 코로나가 어서 끝나서 서울에서 모두 만나는 그 날을 기다리는 희망이다. 이 축복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살자. 오늘 이 아침에도 코스모스가 파도치는 들판에서 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정답게 메아리친다. 춘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