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마스터스에서 경기하는 랑거. /오거스타 내셔널

독일 노장 골퍼 베르하르트 랑거
36살 어린 디섐보와 대결에서
정확성.치밀한 전략으로 승리
“장타 못 쳐도 할 수 있는 일 최선”
業을 지켜온 선배가 멋있다



장타의 초(超)격차를 선언하며 우락부락한 몸으로 변신한 브라이슨 디섐보는 올해 US오픈 우승 이후 모든 골프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이제 벌크업과 장타는 골프의 문을 여는 단 하나의 열쇠처럼 보일 정도다. 드라이버 길이를 몇 인치 더 늘릴 것인가, 근육을 얼마나 더 불릴 것인가, 단백질 셰이크를 몇 잔까지 마실 것인가 같은 얘기들이 골프 미디어를 도배했다. 대세이자 신드롬이 됐다.

하지만 올해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골프 경기에선 디섐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63세 독일 골퍼 베른하르트 랑거가 주연이고 디섐보는 조연이었다. 랑거는 한 달 전 마스터스에서 이 대회 역대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20년 만에 다시 썼다. 400야드 장타로 마스터스를 초토화시킬 작정이라던 디섐보는 뜻밖에도 현기증을 호소하며 가까스로 컷을 통과했다. 그리하여 비거리 1위 디섐보와 꼴찌 랑거가 최종 라운드 같은 조에서 만나게 됐다.

둘은 다윗과 골리앗만큼이나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나이는 36살, 몸무게는 36㎏ 차이. 드라이브샷 거리는 홀마다 평균 60야드쯤 벌어졌다. 결과는? 이날 랑거가 71타(최종합계 29위)를 쳐 73타 친 디섐보(34위)를 앞섰다. 어떻게 가능했나? 350야드짜리 파4홀인 3번홀이 좋은 예다. 디섐보는 드라이버로 328야드를 날려 그린에 곧장 올렸으나 20m 거리에서 세 번 퍼트해 아쉬운 파를 기록했다. 랑거는 우드로 220야드를 보낸 뒤 세컨드샷을 그린에 올려 4m 버디 퍼트를 넣었다.

지난 11월 메이저 골프 대회 마스터스에서 역대 이 대회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세운 63세 베른하르트 랑거./마스터스 트위터
지난 11월 메이저 골프 대회 마스터스에서 역대 이 대회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세운 63세 베른하르트 랑거./마스터스 트위터

랑거는 우드나 하이브리드처럼 상대적으로 불리한 긴 클럽을 자주 꺼내들었다. 그래도 정확성 높았고 전략이 치밀했다. 그린을 놓치더라도 칩샷 하기 유리한 지점으로 공을 보내 스코어를 지켰다. 반면 컨디션 난조로 애먹었다는 디섐보는 실수가 잦았다.

1985년과 1993년 마스터스 챔피언인 랑거는 “매년 이 대회 나올 때마다 젊은 선수들 장타를 바라보며 더 늙는 기분”이라고 했다. 오르막이 많아 무릎도 아프고, 코스가 점점 더 길어지니 긴 클럽 자주 쓰는 플레이가 재미없다고 했다. 디섐보 구경하느라 경기 도중 넋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디섐보 역시 랑거를 관찰하다 충격 받은 듯했다. “랑거는 어떤 상황이든 포기하지 않고 견뎌내더라. 아이언샷은 너무 뛰어나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바로 옆에서 장타를 날렸는데도 랑거가 더 잘했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성적을 낼 수 있다는 게 골프의 매력이다.”

1980년대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랑거는 최근까지도 스트레칭과 체력 운동에 전념하면서 미PGA 시니어 투어를 평정해왔다. “수영장 청소든 설거지든 나의 100%를 다 쏟아붓는다”는 게 골프를 대하는 그의 자세다. ‘어떻게 하면 샷 거리를 최대한 늘려 더 쉽고 유리한 골프, 이길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골프를 할 것인가’에 온통 관심이 쏠린 이때, 랑거는 자신이 평생 해온 골프를 군더더기 없이 보여줬다. 할 수 없는 일에 조바심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전력을 다하며, 스스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철저하게 코스를 헤쳐나갔다. 나머지는 “뭐, 어쩔 수 없지”라며 쿨하게 웃어넘겼다.

그와 3라운드 동반 플레이한 또 다른 장타자 로리 매킬로이는 “내가 랑거만큼 거리가 짧다면 과연 몇 타나 칠 수 있을까. 체계적으로 플롯을 짜고 필요할 때 타수를 지켜내는 방식이 진짜 멋있더라. 30년 뒤 나는 랑거와 정확히 똑같은 골프를 치고 싶다”고 했다. 일장 훈시도, ‘라떼는 말이야’도 필요치 않다. 업(業)의 본질을 조용히 온몸으로 보여주는 선배가 언젠가는 되고 싶다. 랑거의 골프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최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