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고, 나이가 들수록 신체적으로 노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과학과 의술의 발달이 인간의 생로병사에 관여하면서 기대수명이 늘어났다지만, 백세시대에서 백 오십 세까지 사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젊음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인간이 나면서부터 짊어져야 할 숙명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던 늙음에 대한 단순한 진리를 요즘 들어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늙음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더니 마흔이 훌쩍 넘으면서 몸에 나타나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몸 여기저기가 아프고 쉽게 피곤을 느낀다. 힘껏 달렸을 뿐인데 전에 없던 다리의 통증 때문에 절뚝거리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울타리를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포기하고 울타리 밑으로 기어 나왔다. 잘 부딪히고, 멍이 자주 든다. 책을 볼 때면 끼고 있던 안경을 벗고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어릿어릿한 글자들을 보며 돋보기안경의 쓰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느 날은 정기 검진을 받으러 치과에 갔다가 어금니 하나를 뽑고 나왔다. 의사는 어금니에 금이 가서 살릴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나 필요할 줄 알았던 임플란트 시술을 해야 한단다. 노인들의 삶의 질을 높여 준다며 떠들어대는 임플란트 광고를 볼 때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두 개 올라오던 흰머리의 개수가 점점 늘고 있다. 소화력이 떨어져 좋아하는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마음껏 먹을 수가 없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내가 늙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나는 늙고 있는 중이다. 내 청춘도 젊음도 세월 앞에 무릎을 꿇고 사그라들고 있다. 어쩌면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나는 훨씬 전부터 노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늙는 것은 사람의 육체뿐일까?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러가지만, 몸과 마음은 느리게 반응한다. 나이가 들면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상사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나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정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찾아 헤매다 보면 몸보다 마음이 더 지친다. 나는 때로 내가 누구인지, 괜찮은 사람이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은 많아졌는데 결정을 내리기는 갑절로 힘들다. 이제 와서 삶의 목적지를 바꾸고 똑바로 나아가려 하지만 흐릿해지는 등대의 불빛을 놓치지 않으려면 계속 키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다. 소유하고 싶었던 물건들이 더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강조하는 자기 계발서의 내용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내가 알고자 했던 삶의 진리란 제목이 멋진 베스트셀러 책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나의 영혼을 깨우는 한 권의 책으로도 충분하다.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기를 즐기고, 때로는 지름길을 두고 기꺼이 사색하기 좋은 먼 길을 찾아 돌아간다. 번잡한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인의 삶을 꿈꾸며 침묵 가운데 깊이 침잠하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에 일어나는 이런 변화도 얼굴에 생기는 주름살처럼 나이가 들면서 겪게 되는 노화의 증세 이리라.
세월은 물처럼 흐르고 사람도 그 물결을 타고 바람을 맞으며 변화를 거듭한다. 인간이 나서 늙고 죽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하늘의 법칙이다. 예전 같지 않은 몸과 마음의 변화를 겪으며 나는 내가 늙어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앞으로 노화의 광풍에 균형을 잃고 질병과 죽음 앞에 더 가까이 이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추하게 늙어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성숙한 인간으로 무르익지 못하고 늙는 것이다. 단순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작은 것에 자족하며, 참된 이치에 따라 살아가야 할 텐데...... 세월만 흘려보내고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 제대로 우려낸 차에서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듯 겉모습은 날로 늙어 초라하게 될지라도 내면은 더 깊고 그윽하여 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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