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언니는 그때도 없었어

권은경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1-12-01 09:44

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엄마의 70세 생신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숫자 70이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을 헤집었고,
나는 그 숫자가 주는 특별함을 찾아보려 했다. 칠십은 고희 또는 종심이라고 부른다. 고희란 70세
생일로 사람이 일흔 해를 사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종심이란 나이 칠십이
되면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단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칠순은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보다 살아온 날을 치하하기 위한 감사의 의미가 크다.
숫자 70을 허공에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며칠을 보냈다.
 
엄마가 어느덧 노년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니 괜히 서글퍼졌다. 나는 요즘 거울 속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곤 한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엄마를 점점 더 닮아간다. 외모뿐 아니라 말투, 걸음걸이,
습관 등 깜짝 놀랄 만큼 비슷한 점이 많다. 항상 붙어있던 엄마와 나누어져 살아온 지가 벌써 십
년이 다 되었다. 엄마의 예순 살 생신날에도 나는 함께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엄마의 70세
생신에는 곁에서 마음껏 축하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고 나는 여전히
엄마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다. 왜 그리 멀리 갔냐고, 보고 싶다고 울먹이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가까이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가장 큰 불효라는 것을 알았다.
 
동생과 함께 엄마의 칠순을 어떻게 기념하면 좋을지 의논했다. 내가 있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크고 작은 집안 경조사를 챙기느라 동생은 부산해 보였다. 유례없는 전염병의 창궐로
일가친척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베풀 수는 없다 하더라도 험난한 세월을 견디고 삶의 잔잔한 여운을
이어가고 있는 엄마의 생신을 축하해야 함이 마땅했다. 식당을 예약하고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주문했다. 많지 않은 용돈도 따로 준비해 전달하기로 했다. 동생 내외는 멀리 있는 나를 대신해
엄마, 아빠를 살뜰하게 챙기고, 만족스러운 고희연을 치렀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부모님의 사진
속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나는 안도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못다 한 생신 축하를 성대하게
치르겠다 약속하며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밤이 되고, 동생이 보낸 사진 한 장을 받아보았다. 엄마가 환갑 때 찍은 사진이었다. 십 년 전
엄마는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젊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엄마를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가 늙고 아픈 게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멀리 와 있어서, 엄마 곁을
지켜주지 못해서 그녀의 노년이 걱정과 그리움으로 얼룩져 있는 것 같아 깊은 회한에 잠겼다.
그리고 사진 아래에 쓰인 짧은 문장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언니는 그때도 없었어.’ 나는 돈과
물질로 메울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간극 속에 소중한 삶의 파편들이 흩어져 버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십 년이란 시간 속에서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그간 잊고 살아온 것들이 작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착잡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며 외면했던 삶의 순간들의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 너머로 엄마의 손을 잡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는 내가 보였다. 활기 넘치는
재래시장의 좁은 골목을 누비며 갓 튀겨낸 찹쌀 도넛을 사 먹는 어린 나와, 물 좋은 고등어가
들어왔다는 생선가게 아줌마에게 시선을 돌리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싱싱한 채소와
생선, 과일로 채워진 장바구니 만큼이나 내 마음도 풍성했다. 언제나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에 내게 주어졌던 모든 날 안온했다.
 
엄마와 떨어져 산 날 동안 가족 간에서 피고 지는 행복을 놓친 것은 아쉽지만 함께한 추억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고독한 이방인의 삶에도 온광이 머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엄마 옆에서 웃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그날이 오면 엄마와 사진을 많이 찍으리라. 엄마 옆에
바짝 붙어서 엄마처럼 웃으리라. 더 늦기 전에 바라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엄마의 80세, 90세
생신 사진 속에서는 꼭 내 자리를 찾으리라 다짐해 본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가을이 가는 길목 2021.12.10 (금)
별이 되는 그리움 하나 보낸다건드리면 눈물이 될가슴 하나 보낸다 그리 곱던 단풍떨어져 낙엽이 되는차가운 비에 젖어 앓는가을이 가는길목 외로운 것들 끼리끼리 모여눈물이라 이름하고슬픈 사랑 하나 가슴에 묻는노을 저 멀리가을이 가는 길목젖은 단풍이 아리다.
강숙려
포도주와 노부부 2021.12.10 (금)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림뿐이다. 그늘진 곳에 놓인 항아리 속 포도주는 지금 숙성 중이다.와인을 ‘병에 담긴 시(Wine is bottled poetry)’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어느 날 저녁,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노래하더라/ 나는 알고 있나니 내게 생명을 주고 영혼을주려면/ 저 불타는 언덕배기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땀과/ 찌는 듯한 태양이 있어야 하는가를--- (샤를 보들레르)  올가을 14년생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많은 양의 레드 딜리셔스 품종의...
조정
야생 사과나무 2021.12.10 (금)
사과나무 한 그루가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갑자기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나무는 작고 발그레한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는데,미처 가을이 끝나기도 전에 까치밥 하나 없이 마른 가지 뿐입니다. 사과는 모두 어디로사라져 버린 것일까요. 수풀 가에 서 있던 키 큰 삼나무 밑동까지 잘려 나간 뒤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습니다. 수풀에 자리해 쉽게 드러나지 않던 야생사과나무입니다. 가지에 매달려 노라발갛게...
강은소
내가 친하게 알고 지내는 그는 통역전문가인데 밴쿠버에서 신용과 신뢰가 기본이며 제일 저렴하게 통역료를 받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18세 이상의 주민이라면 예외 없이 매년 1회 세금을 신고 보고서를 국세청(RevenueCanada)에 제출해야 하는데 수년 전 나에게 한국에서 발생한 세금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서 제출해야 했다. 전문 번역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때 우연히 그를 알게 되었다. 이 보완 서류의 번역은 일반적인...
이종구
구중 궁궐 납골당에 유리방  한칸 얻어놓고 나 이 세상 끝에 와 섰네눈물이 난다 세상이여다시 널 사랑하게 될까봐흘러 넘치는 그 많은 추억들주섬 주섬  꽃바구니에 담아보라빛 노을에 걸어놓고나, 사랑에 우네나, 이별에 우네인생이 아프기만 했던 것은 아닌데인생이 슬프기만 했던 것은 정말 아닌데이 세상 다시는 그리워하지 말자고해질녘  함박눈 펄펄 내리는데나는 한없이 울고 울었네납골당은 아무 말이 없는데........
김영주
엄마의 70세 생신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숫자 70이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을 헤집었고,나는 그 숫자가 주는 특별함을 찾아보려 했다. 칠십은 고희 또는 종심이라고 부른다. 고희란 70세생일로 사람이 일흔 해를 사는 것은 드문 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종심이란 나이 칠십이되면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단다. 평균 수명이늘어나면서 칠순은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보다 살아온 날을 치하하기 위한...
권은경
어쩌다 은퇴 2021.12.01 (수)
매일 마주하며 살아온소중했던 일상들이어느 날 갑자기세월의 저편 속으로바람이 되어 점점 멀어져 간다희미한 기억으로 청춘이란 내 인생의 봄도행복이란 내 환희의 순간도문득 다가온현실의 벽 앞에서꽃잎처럼 하나씩 사라져 간다아픈 추억이 되어 20년간의 좋은 추억도내 겐 잊어야 할타인이다떠나간 그 시간에 대해서어쩌다 은퇴한 2021년의아픈 상처도이젠 이방인이다다가올 그 시간에 대하여
나영표
가을 기도 2021.11.24 (수)
수수하던 이파리저마다진한 화장을 하는 이 계절에나도 한 잎 단풍이 되고 싶다앙가슴 묵은 체증삐뚤거리던 발자국세 치 혀의 오만한 수다질기고 구린 것들을붉게 타는 단풍 숲에 태우고 싶다그리하여찬란한 옷을 훌훌 벗고겸손해진 겨울 숲처럼고요히고요히사색에 들어입은 재갈을 물고토하는 목소리에 귀담아오롯이 겸허해지고 싶다나를 온전히 내려놓아부름에 선뜻 대답할 수 있기를겨울이 묵묵히 봄을 준비해봄이 싱그럽게 재잘거리는...
임현숙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