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미안하다' 그 한마디

정성화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2-01-17 11:43

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남자들은 뇌 구조상, 스포츠 선수 이름을 기억하거나 기계 사용설명서를 판독하는 일에는 빠르지만 감정이나 상황을 짚어 내는 감각은 여자들보다 느리다고 한다. 우리 집 경우만 봐도 그렇다. 아침나절에 남편이 나를 무시하는 투로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 내가 온종일 굳은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게 자기 탓인지 몰랐다. 류현진이 등판하는 야구를 즐겁게 보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낮잠도 쿨쿨 잤다. 그러다가 다 늦은 저녁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당신,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처가에 무슨 일 있어?"

어떤 말을 내뱉기 전에 세 개의 문을 통과시켜 보라고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라고 묻는 문이다. 남편이 나에게 한 말은 첫 번째 문만 통과했을 뿐, 듣는 이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았다.
​유난히 부부 사이가 좋은 지인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았더니, 꼭 지키는 게 있다고 했다. 언제나 남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말다툼을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남편의 마음을 풀어 준다고 했다. '귀 명창'이란 말이 생각났다. 판소리를 들으며 적절한 때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어 줌으로써 소리꾼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을 가리킨다. 중년 이후로는 자신의 '소리'에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때 다정한 목소리로 '얼쑤' 하는 추임새가 들려온다면 얼마나 반갑고 힘이 날까.
상대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그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화해를 먼저 청한다는 것은 더 넓은 가슴으로 그를 품어 보려는 몸짓이다. 그 얘기를 들으며 그녀의 반이라도 닮아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직은 그대로다.
어느 집이고 간에 지붕이 덮여 있어서 그렇지, 지붕을 벗겨 놓으면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결혼이란 신열로 시작되어 오한으로 끝나기 쉬운 것. 사랑의 감정이 식어가는 속도는 대개 나이를 앞지른다.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힘은, 진심을 담아 전하는 '미안하다' 이 한 마디에서 나오지 않을까. '미·안·하·다' 이 네 글자가 반듯한 사각형 울타리가 되어 우리 가정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과를 제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다. 각자의 생체 리듬이 다르듯, 우리 '감정시계'의 속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 오해가 풀리는 데 걸리는 시간, 상처를 극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과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원망할 일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과를 떼어먹은 적도 많고, 사과를 기다렸지만 상대방으로부터 아무 말이 없었던 경우도 많다. 쑥스러워서,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상대방이 거절할까 봐, 굳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등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안하다'라는 말을 '나 못났다'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지,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문다. 어쩌면 '미안하다'라는 이 말이 우리 마음의 맨 밑바닥에 넙치처럼 납작 엎드려 있어서 그 말을 끄집어 올리기가 힘든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에게는 하기 싫은 그 말이 상대방에게는 가장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일 수 있다.
진정 어린 사과를 받고 나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된다. '정말 나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을까', '굳이 그런 상황까지 갈 일이었나' 하고. 그래서 사과를 주고받은 후에 한결 돈독한 정이 생기기도 한다.

'미안하다' 그 한 마디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사람 사이에 벌어진 틈으로 그 말이 꽃잎처럼 나붓이 내려앉는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해후 2022.02.09 (수)
1세톤 호수를 지나이제 막 도착한 흰가면 열차안개 눈꽃 흩뿌리는창가에 멈춰섰다불빛 안고 기대앉은 그림자들밤길 먼 빙판 호수를 건너가듯시름 삭히며 졸고 있을 때시린 꽃들이 창문을 두드린다한쪽에선 말 없는 눈빛의 대화나는 가고너는 남고붉은 뺨 눈망울이슬 두 방울2막차가 떠날 시간난로에 손을 데우던인자한 시선들주섬주섬 짐을 챙긴다떠나는 길손 너나 할 것 없이손에 쥐고 있던막차 티켓 한 장기대감은 객차에 실리고플랫폼 가장자리...
하태린
마지막 기도 2022.01.31 (월)
  오늘이 2021년 12월 31일금요일이다. 돌아보면 비록 팬데믹으로 만남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두 번째 해의위기를 넘기고 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연초부터 성경 통독을 해오는 동안 오늘 역대서에 이르게 되었다. 이 글은 이스라엘 12지파의 500여 명의 이름이기록되어 읽기가 쉽지 않은 다소 지루한 부분이다. 그런 와중에 4장 중간쯤에서 마치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아주 소중한 두 구절 (역대상 4:9-10)이 들어 있는데 일명...
권순욱
고향으로 가는 길 2022.01.31 (월)
낯선 듯눈에 익은들길을 간다밤이면보석이던 별들이무더기로 쏟아져길섶개망초 가슴에돌부리로 박히고바람 불면 서걱대며 하얗게 핀 억새가을 능선 넘는 노을에이별 자락 펼친다눈 내리면하얀 눈 뒤집어쓴초가지붕장독대그 어릴 적 강아지..고향 산천이 그립다눈에 익은 듯낯선들길을 간다저만치 개망초 지나고억새 숲 스치고 나면하얀 눈으로 내리는 그대 있으매
류월숙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소설 감상평                                                                                                                이명희(목향)/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서두-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판타지 소설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이명희(목향)
Cell 폰 2022.01.31 (월)
여보게다사다난 이란 말은일년을 되돌아 보는십이월의 낱말이 아니더군.물정에 어두운 매일매일 이다사다난 이구려자네와 나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고서야뜻의 높낮이와 실체의 유무를 아는아나로그 의 더딘 세대가 아닌가만가지 기능을 꾸겨 넣은이 조그만 전화기 마저도친근함 보다는낯 선 이물질의 끊임없는 어설품을 느끼고소통의 문을 열기위해누르고 톡톡 치고 밀고 당기는....그 동작으로 만 연결 되는 통로가그저 숨 가쁘기만...
조규남
꼬박 만 2년여를 팬데믹의 우울한 잿빛 그림자 속에서 지내온 셈이다.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아 6호선 3번 열차에 떠밀려 탑승을 하게 되면서, 문득 쳐다본 달력 위 ‘2022’라는 굵은 숫자는 진정 어린 시절의 공상과학 소설과 ‘새소년’ 잡지의 미래특집난에서나 만나던 숫자로 다가온다. 중년의 입문 단계에 서서, 특히나 아직도 오미크론과 델타 그리고 부스터 샷 등등 기이한 공상과학 만화의 용어들이 난무하는 이 수상한 시절에 나의 버킷...
민완기
날이면 날마다(2) 2022.01.24 (월)
숨 쉬듯이늘 간절(懇切)하게 살아요눈 껌벅이듯이늘 감사(感謝)하며 살아요귀 기울이듯이늘 겸손(謙遜)하게 살아요냄새 맡듯이늘 근면(勤勉)하게 살아요맛보듯이늘 검소(儉素)하게 살아요물 마시듯이늘 순리(順理)대로 살아요밥 먹듯이늘 공부(工夫)하며 살아요갈아입듯이늘 개선(改善)하며 살아요움직이듯이늘 활발(活潑)하게 살아요배설하듯이늘 운동(運動)하며 살아요잠자듯이늘 사색(思索)하며 살아요말하듯이늘 기도(祈禱)하며 살아요 
김토마스
얼마 전 눈이 연이어 많이 온 날이었다. 유독 몸이 좋지 않아 피곤한 아침이었던 터라 게으름을 부리고 있던 터였다. 눈이 워낙 많이 왔고, 기록적인 영하의 날씨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눈을 치워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누워있는 내내 처리하지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내내 불편했고 왠지 일종의 할 일을 미루는 중이라는 죄책감도 있었다. 하지만 쉬이 몸이 일어나지지 않더라. 그렇게 마음은 편치 않게 한 시간 정도를 빈둥대며...
윤의정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