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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한 바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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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2-01-17 11:45

정효봉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눈이 떠졌다. 마주 보이는 디지털 시계가 새벽3시를 보여준다. 더 잘까? 일어날까? 세 번, 반복된 생각을 하다  침대 옆 스탠드를 켰다. 아내가 이내 “아니 좀 더 자지”  하고 말렸으나, “아냐, 어차피  누워 있어봐야  잠은 더 이상 안 와.” 라고 대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내도 “그럼, 짐 실읍시다.” 하며 이것 저것 챙기기 시작하였다. 아내가 미리 정성스럽게 만들어 냉동시킨 밑반찬과 식품들, 그리고 호텔에서 사용할 용품들이 트럭 짐칸에 가득 쌓여서 여행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4 시, BTS의 노래를 들으며 힘차게 출발하였다.
   오늘이 열여덟 번 째, 내가 운영하는 호텔로 가는 장거리 트럭여행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비행기 대신 시작된 정기적인 이 여행은 한 겨울 도로 사정이 최악인 경우를 제외하고 매월 한 번 이상 이루어졌다. 열 여덟 번 트럭운전을 한 총거리의 합은 46800 Km,  에라토스 테네스가 태양에 비친 그림자를 이용해 잰 지구 둘레 한 바퀴의 거리가 약 46000Km (실제 길이는 40000Km) 이니, 지구 한 바퀴 이상의 여행을 한 셈이다. 약 일년 반 동안 계획한 여행을 하면서 일어난 일들이 새벽 신선한 공기와 함께 몇 편의 단편영화처럼 펼쳐졌다.
    여행의 시작은 코로나 발생 직후 4월, 포트세인트존 도시에서 출발해서 프린스조지를 지나 퀘넬을 거쳐 윌리암스 레이크 그리고 캐쉬크릭까지 이어지는 친숙한 97번 고속도로를 거쳐간다. 도로의 상태는 아주 좋고, 자연경관이 뛰어나며 북부 특유의  침엽수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도로  주변으로 잔잔한 호수와 강 그리고 평화로운 소떼가 풀을 뜯는 광활한 목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특히 이 곳 BC 북부와 알버타에서 방목하는 소들은 거의 야생소와  다름 없이 축사도 없고 겨울에도 목장에서 건초더미와 함께 키워진다. 이렇게 키워진 소들은 양질의 마블링을 만들어 세계 최상 고기의 질을 자랑한다고 한다. 더불어 이 지역을 지나다보면 다양한 야생동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느 봄 날, 포트세인트존에서 체트윈을 막 지나는데 바로 몇 미터 앞에 집채만한 무쏘 한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그 무쏘는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다리 관절이 반대방향으로 꺾여져서 많은 피를  흘리며 꼼짝못하고  있었다. 바로 옆 트럭은 앞 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고 운전자는 불편한 몸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다. 황급히 차를 세우고 내려보니, 다행히 운전자는 크게 다치지는 않은듯 보였다. 그 운전자가 여기 저기에 상황을 연락을 하고 있었고, 나는 괜찮은지 물어보며 교통사고 처리반이 올 때까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잠시후 동물 보호단체 직원들이 도착해 무쏘를 응급조치 하고 동물병원으로 이송하였다. 본인의 사고를  신고하고 경찰을 기다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운전자는 무쏘가 위급한 상항이라 판단하고 동물 보호단체에 먼저 연락했고 무쏘가 병원에 실려간 후 그제서야 본인의 교통사고를 신고하려고 했다. 그 운전자도 허리를 다친 것 같아 보였지만, 그는 자신보다 다친 동물의 치료가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평소 야생동물에 대한 나의 관념은 그 순간 완전히 바뀌었다. 이 땅에 사는 야생동물들은 단지 호기심만 가지고 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을 가진 동반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몇 번의 여행을 한  후 겨울이 왔다,  메켄지 도시를 지나 체트윈 언덕을 막 지나는데, 갑지가 ‘쿵’ 하면서 내 트럭이 도로 가드레일을 받고, 세 바퀴 정도 돌며 뒤뚱뒤뚱 거리다 도로 옆 눈무더기에 박혔다.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얼마 뒤 지나가던 한 부부가 다행히 내 차를 발견하고 달려와서 눈에 박힌 차의 문을 두 사람이 당기고 나는 안에서 밀고 해서 겨우 문을 열었다. 그 부부는 내 차가 골짜기로 빠지고 있으니 빨리 내려야 한다고 소리쳤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정신없이 뛰듯이 문을 뛰쳐나왔다. 내가  나오고 몇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차는 완전히 눈더미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렸다. 지나가던 그 부부가 나를 보지 못했다면 난 완전 눈 더미에 갇혀서…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매섭게 추운 날씨에 차 안에 자켓을 두고 급하게 나오느라 난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런 나를 그 부부는 그들의 차에 태워 따뜻한 음료를 건네주고 담요를 덮어주며 친절하게 보험회사와 경찰에게  연락을 해주었다. 잠시 후 경찰이 도착해 간단한 수속 후 견인차를 불러서 사태를 마무리해 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좀 진정이 되고 안심이 되었다. 난 그때까지 고맙다는 인사 조차 잊고 있다가, 비로서 고맙고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하며 전화 번호를  받았다. 그 부부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내가 다친 곳이 없으니 다행이라며 앞으로 조심히 운전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그 지역을 지날 때마다 아찔했던 그 당시의 기억과 함께 생명의 은인이었던 그 부부의 고마움이 생각난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어느덧  프린스조지 도시의 휴게소를 막 넘어서는데, 내 앞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섰다. 운전자가 내려서 내 차로 다가오더니 목재 트럭이 전복 되어서 복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앞으로 몇시간 동안 도로를 막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오늘이 내가 계획한 여행 마지막 날인데 혹시 뭔가 잘못 될까 불안하기도 하였고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것 같아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앞 차 운전자는 아예 간이 의자를 꺼내놓고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뒤를 돌아보니 끝없이 긴 줄의 운전자들이 불평은 커녕 모두들 내려 마치 해변가에 햇빛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처럼 자동차 문을 활짝 열고 햇살을 쬐고 있었다. 몇몇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하면서  소풍 온듯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잠시후 맞은 편에서 트럭 한 대가 생수병을 가득 실고 천천히 오면서 물 한 병씩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도 차에서 내려 슬그머니 물병 하나를 집어들고 목을 축이며 분위기에 맞추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여유를 가져보려고 애썼다. 아무도 도로 복구 상황을 캐묻는 사람도 없었고 너무 평화로워서 내가 불평할 여지가 없었다. 불평을 한다고해서 도로가 더 빨리 원상복구가 되는 것도 아닐텐데, 그 쉬운 이치를 나만 모르고 있었다.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은 밤 11시 경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 뭔가 해낸 것 같은 성취감과 함께 지구 한 바퀴 거리를 돌고온 여행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세상의 밝은 면은 어두운 면보다 훨씬 많으며, 또한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여행이었다. 오늘 밤 꿈 속에서 다친 무쏘를 먼저 걱정했던 운전자, 그리고 눈더미 속에서 힘껏 날 당겨 꺼내준 친절한 부부를 만나길 바라며 잠을 청해본다. 따뜻한 봄이 오면 나의 지구 한바퀴 여행은 지구 두 바퀴 여행으로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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