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22-04-11 10:26

자명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미스 김은 아무리 보아도 뛰어난 미인은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생 얼굴 열아홉 처녀의 한국적 미인이라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일 년 중 유독 5월 며칠 동안만 곱게 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초연하기만 하다. 미스 김에게서 향기를 맡아보고 싶다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얼마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러다 5월 미풍이 일렁거리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비로소 그녀의 향기에 젖어 들게 되리라.
나는 5월의 꽃 라일락 앞에 서 있다. 북미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목의 하나인 미스 김은 원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의 꽃이었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수수꽃다리. 우리에게 라일락 이름으로 더 친숙했던 그녀는 미국으로 이주 후 미스 김이라는 독립된 꽃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이미 반세기를 북미 땅에서 살아 온 그녀도 영락없는 우리의 자태이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서양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기간은 5월 중순 무렵 진한 화장을 했을 때만 가능하다. 꽃이 피기 전엔 우리나라 수수꽃다리와 구별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서다. 그녀의 일가들은 우리나라 수종에 비해 조금 더 화려하고 키가 작으며 꽃이 오래가면서 향기는 더 짙다. 한국의 수수꽃다리는 흰색이 많은 편이나 그네들은 연한 보라색이 주종을 이룬다. 한국의 원종에 비해 쉬 뿌리 내리지 못하는 것도 이국땅에 대한 거부감이었을까. 심은 지 1년이 지나고 풍토에 적응한 후라야 성장을 시작하고 꽃을 피우는 습성도 이주 후 달라진 점이다.
그녀는 해방 직후 미국 농무성에 근무하던 미더 교수를 따라 미국 땅으로 이주하였다. 미국 농무성 관리들은 각국의 수목 원종을 불법으로 채집해 자기 나라로 가져가 개량 후 새로운 이름을 짓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상품화 하던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기였다. 미스 김도 고향 황해도에서 미국으로 강제 이주 후 개량을 주도한 미더 교수에 의해 미스 김이라는 독립된 꽃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녀 앞에 서 있으면 금시 먼 기억 저편으로 여행을 떠난다. 라일락 하면 청춘의 상징처럼 사랑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되지만 내 청년기의 사랑이란 단어는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여학교 교정마다 가득했던 5월의 꽃 라일락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시에 실연당한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꽃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을 때,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애달프던 이들에게 하트모양의 꽃잎 하나를 깨물면 비로소 사랑의 아픔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속설에서다. 은은한 향기와 함께 희망과 설렘, 애정과 시정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꽃말을 배반하듯 꽃잎 하나를 깨물면 지독한 쓴맛과 입안을 얼얼하게 만드는 독한 향기는 사랑이란 양면성의 감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서울 옥수동 마루턱으로 가는 약수동 고갯길엔 2층 양옥집들이 즐비했다. 석간신문을 돌리다가 힘에 부쳐 담벼락에 내 가난을 잠시 내려놓으면 금방 잠이 들었다. 서서 잠을 자는 법도 그때 배웠다. 유학을 위해 무작정 상경해 스스로 학업과 생업을 짊어져야 했던 내게 끼니를 굶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꿈속이었을까 피아노 소리와 함께 후각을 자극하던 그 향기는 초상 없는 한 자락의 설렘이었다. 아득한 정신으로 올려 다 본 5월 하늘엔 쪽빛 실루엣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열다섯 내 사춘기는 그 쪽빛 수평선 외줄을 타고 쓸쓸한 허기와 함께 그렇게 찾아왔었다.
미스 김 앞에서 잠시만 눈을 감아도 그때의 피아노 소리는 공명으로 조망되어 달려오고, 그때 하얀 이층집을 가득 에워싸던 무리들이 바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미스 김 그네들이었다는 것도 기억이 새롭다.
5월 끝자락 석양 아래 한 다발의 라일락으로 얼굴을 가린 체 가만히 나를 내려보던 그 눈빛은 꿈속의 환영이 아닌 피아노 치던 여학생이었다는 것도... 빛이 바래지 않은 환유의 연두빛 기억 속에서 달려온 그 여학생 얼굴이 떠오르면 나는 또 금시 홍당무가 되고 만다. 라일락 선율과 함께 짝지어 찾아 온 나의 열다섯 사춘기는 그렇게 왔다가 또 울림 없이 침잠 되고 말았다.

미스 김의 원적은 동유럽 헝가리였다고 한다. 어떤 이는 실크로드를 따라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하고, 더러는 이조 중엽 중국에서 들어와 북한 지역에 뿌리내려 자생하면서 우리 꽃으로 진화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함께 자란 주변의 꽃들은 외국에서 이주해와 우리 꽃으로 토착화 되어 한글 개명과 함께 다시 태어난 것들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지은 이름을 그대로 둔 채, 외래어로 된 꽃 이름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외국에서 건너온 꽃 이름을 지을 때, 이상학적이거나 개량을 한 사람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우리 땅에서 자생하는 수목이나 생활 속의 시정을 연관 지어 한글로 개명하였다. 어찌 보면 덜 세련돼 보이고, 촌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수수함이 주는 그 의미는 꽃처럼 아름답다. 라일락은 수수꽃봉우리를 닮았다 하여 수수꽃다리라 지었고, 클로버는 시계꽃이라 부른다. 그뿐 아니다. 아이리스는 붓꽃, 에델바이스는 솜다리 꽃, 썬플라워 보다는 해바라기가 더 정겹지 않은가.
 
미국의 미더 교수는 왜 미스 김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몹시 궁금하다. 상업적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도 어눌한 한국말로 수수꽃다리라고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 서양사람들에게 익숙한 라일락(영문), 리라(프랑스)이름에서 착안했을 성도 싶은데, 불법으로 채취한 원 종을 의식한 일말의 양심에 대한 배려였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낯선 이국땅에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손자 그 손자의 손자 대대로 살아가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불변의 정체성, 성(姓)의 계승일 것이다. 미국 땅으로 미스 김을 이주 시킨 미더 교수가 한국에 머물 당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수직적 사회관습의 영향으로 미스 김의 모티브를 찾았는지 모른다. 풍문으론 미더 교수의 잔심부름을 도와 준 사람이 미스 김 이었다는 설과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를 상징하여 미스 김으로 이름 지었다는 것도 설득력을 얻는다.
 
근자, 미스 김 그녀는 역이민자 신분으로 한국 진출의 러시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 그들을 초청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미스 김 라일락으로 부르고 있으며 인기 있는 정원수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에서 이민 간 그녀가 외국인 신분으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체. 그녀도 제가 나고 자란 모국 땅이 낯설어 잠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나 금세 동화되어 갈 것이다. 우리가 이국이 땅으로 이주하여 뿌리 내리고 영원히 살아갈지라도 그 불변의 의식적 요소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 정체성은 영원할 것이니.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민들레 홀씨 되어 2022.04.25 (월)
수줍은 눈빛위로 틔워낸 작은 희망외로운 마음둘레 아득한 기다림을뉘 있어 번져내는가 민들레 울 영토에사랑하리 사랑하리라 가난한 이름으로잡초 속 봉헌하는 노오란 한 송이 꽃인내로 저민 가슴에 소리 없이 불을 켜고그러다 어느 날엔가 혼자 된 홀씨 하나부활의 탯줄을 끊어 산과 들 넘나들며복음을 선포하리라 믿음의 향기 피우리라
이상목
매우 그립습니다 2022.04.20 (수)
사순절 이맘때가 되면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천국은 백합화 꽃이 많아 황금길도 있고" 하시며 천국을 소망하시던 반병섭 목사님!소천 하시기 며칠 전 " 나 천국 보고 왔어. 생명수 강이 흐르고 황금 길도 걸었지. 예수님도 뵙고 특히 백합화 꽃이 많아" 하시며 환한 얼굴로 말씀하시더니 결국 백합화로 장식된 사순절 2017년 3월25일에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반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은 1995년 1월 17일 유학 왔을 때 입니다. 남편 신학 대학교 대선배이신...
박명숙
산(4) 2022.04.20 (수)
겨울 지리산 자락의햇살은 산 너머에 지니어느새 고즈넉한 검은 치마자락이산을 덮는다.저녁 예불 스님의 목탁소리세상의  시끄러움을 잠재우고청아하게 들리는 법종은내 영혼을 고즈넉이 잠재우네.이른 새벽산도 바람도 고요히 잠든 사이하늘의 별들이 비춘 창 밖의 풍경산이 마치 수도승의 와상을 하고 있네.새벽녘 비구 스님의 청아한염불소리는 어둠을 물리고동이 트기전부터 세상을 깨우네아하,산사 대광보전의 본존께서 염화의 미소를...
구정동
언젠가부터 며느리였던 나는 시어머니가 되었다. 시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던 나.삼십 오 년 전 외아들에 홀 시어머니와 11년을 함께 살면서, 심한 치매로 2년간을 많이 아프시다 돌아가신 시어머니에 대한 추억이다요양원이 없던 시절 심한 치매가 온 시어머니를 젊은 내가 모시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어머니는 나를 미워하고 나는 어머니를 미워해서 서로 벌을 받는 것이라고 그런 생각조차 했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내고 왜 그리...
김순이
새 봄의 서정 2022.04.20 (수)
얼음이 풀리고참았던 눈구름 봄비로 내린다땅 속으로 흐르는 봄의 기운분홍 햇살로 심하게 몸을 흔들며새 생명을 맞고 있다불덩이같은 울혈로 여름을 승화하고무성한 잎들은 허상이 되어 몸을 숨겼다이별하는 아쉬움에 슬슬 뿌려대는짓궂은 자투리 겨울다시 돌아올 그날을 위해남겨 놓은 시린 풍경화는행복했다고 착각한다바람의 울음은 거세고천지에 널부러진 한기는눈 바람 비 바람 사이로검푸른 하늘을 가르고 있다심하게 몸살을 앓았을 겨울...
김수진
미스 김 2022.04.11 (월)
미스 김은 아무리 보아도 뛰어난 미인은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생 얼굴 열아홉 처녀의 한국적 미인이라야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일 년 중 유독 5월 며칠 동안만 곱게 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초연하기만 하다. 미스 김에게서 향기를 맡아보고 싶다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얼마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러다 5월 미풍이 일렁거리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비로소 그녀의 향기에 젖어 들게 되리라.나는 5월의 꽃 라일락 앞에 서 있다. 북미 유럽에서...
자명
민들레 김치 2022.04.11 (월)
놀랍지 않은가  까탈스런 입안에천하의 부랑아가 씹히고 있다 때로 앙숙들 사이엔포용력이 실마리가 되곤 한다 씹어주던가씹혀주던가.   ——————————————————————————-———————————-—————————————- 하얀 집이 있고, 잔디를 잘 가꾼 곳에 가면 온갖 시름이 사라진다. 주인의 수고는, 비록 잡초를 뽑고 잔디를 깎아야 하는 여름 동안 그 반복적 임무라 해도 힘든 것...
김경래
다람쥐 날다 2022.04.11 (월)
나른한 오후, 봄 햇살이 가득한 공원에는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호수위로 활짝 핀 연꽃들로 인해 향기로운 꽃냄새가 여기저기 진동을 했다. 엄마 다람쥐는 콩이에게 200살 나무 할아버지 집에 가서 사람들이 놓고 간 콩과 씨앗들을 챙겨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콩이는 이제 10살이었다. 호기심과 장난이 심해서 늘 엄마에게 꾸중을 듣지만 마음은 착해서 주위에 이웃인 나무 할아버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며칠 전, 콩이는 씨앗과 콩을 가지고 오다가...
허지수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