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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속의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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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2-10-24 12:58

심현숙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나는 지금 한국에서 70여 인생의 삶 중에 가장 한가하고, 가장 편안하게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동생네로 숙소를 정하려 했으나 오미크론 등으로 계획을 바꿔 장기 투숙할 수 있는 호텔로 들어왔다. 방 면적이 17평이지만, 실 평수는 절반이니 좀 답답하다. 처음 며칠간은 침대에 누우면 바로 앞 벽이 가슴을 압박하는 것 같아 잠들기가 힘들었다. 물론 시차도 있었지만. 현관을 들어서면 기다란 실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현관 왼쪽으로 신발장과 작은 드럼 세탁기를 넣은 장이 있고 그 옆으로는 싱크대와 인덕션이 있어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다. 현관 오른쪽은 샤워장이 붙어있는 화장실이 있고, 그 옆으로 냉장고와  2인용 식탁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전자레인지가 놓여있다. 이외 가구는 일반 호텔과 같다. 여기에 내가 가져온 여행 가방 3개와 노트북 그리고 책 몇 권이 지금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다. 어른이 된 후, 이렇게 간소하게 사는 건 처음이다. 마치 군더더기 없는 한 편의 수필처럼 깔끔하여 기분 좋다.
 처음에는 좁은 공간에 딸과 두 사람이 기거하다 보니 서로가 몸이 부딪치기도 하고, 불편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내면서 서로를 배려하는 요령이 생겼다. 방에 함께 있을 때는 전화 등 소리 나는 일은 자제하고, 불가피하게 같은 시간에 취침할 수 없을 때는 조명에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그 좁은 공간이 오히려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딸 친구의 소개로 생수와 유기농 채소나 과일, 조리된 국까지 주문하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한 밤부터 쏟아지는 폭우와 폭풍에 우리는 온종일 호텔 방에 갇혀있었다. 다음 날 새벽 5시쯤이었을까. 카펫이 깔린 복도에 바퀴 끄는 소리가 어슴푸레 잠결에 들려왔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일어나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어보니 주문했던 생수와 박스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창문 커튼을 젖혀보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텔레비전에서 뉴스로만 보았던 새벽 배송을 받은 것이다. 물건을 옮기며 "참 감사하구나"라고 중얼거렸다. 폭풍이 치는 이 새벽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이토록 수고한다 생각하니 한없이 고맙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 우리는 택배기사를 위해 현관문에 [택배 기사님, 감사합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비닐봉지에 든 음료 가져가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음료를 문에 걸어두었다. 이렇게 우리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6년이 넘어, 딸은 8년 반 만에 그리운 모국에 왔다. 많은 것이 생소하고 낯설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몇 번쯤 바뀐 느낌이다. 너무도 달라진 문화 속에 당황스레하기 일쑤다. 카페의 화장실 문까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열리지 않는 화장실 문이 손잡이에 손등을 대면 숫자판이 뜨고, 영수증 맨 아래 기록된 숫자를 누르면 문이 열린다는 걸 뒷사람을 보고서야 알았다. 스마트 폰에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도를 깔고 찾아다니지만, 아직도 길을 묻고 또 물어야 목적지에 도착한다.
 밴쿠버에서 조용하게 살다가 한국의 수도 서울로 외국 여행을 온 기분이다. 30여 년 전 8학군에서 그토록 익숙하게 살았던 내가 이제 외국인처럼 느껴지니 서글프긴 하지만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더 생긴 것 같다. 밴쿠버에서는 매일 텔레비전에서 한국 뉴스와 몇 가지 프로를 열심히 보았다. 이민해 온 지 오래 됐는 데도 모국이 그리워 한국 것이라면 뭐든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해본다. 언어도, 문화도, 자개장도, 한국 도자기도, 병풍도, 책도 버리지 못한 채 껴안고 위안받으며 향수를 달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때 과감하게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적거리고 있다.
 달포가 넘도록 좁은 공간에서 최소한의 살림살이로 생활하지만, 불편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동안 너무 많은 물건 속에서 체이고, 스트레스받으며 살았지 싶다. 꼭 필요한 것만 갖고 생활해 보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시간에 쫒기지 않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나 자신이 보인다. 물건에 쌓인 먼지를 닦고, 넓은 집을 청소하는 시간이 왠지 아깝게 느껴진다. 나는 필요 이상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살면서, 그것에 가려 소중한 것을 놓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난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 커튼을 열고 그 앞에 서 있는 걸 좋아한다. 남산 타워가 한 눈에 들어오고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이 정겹게 보인다. 서울이 평화롭게 보인다. 나도 편안하고 행복하다. 2년 넘게 갇혀있었던 우울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것 같다.
 
 법정 스님은 난초를 키우면서 물을 주기 위해 외출도 못 하실뿐더러, 외출할 때는 빨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신다. 자신이 난초를 소유하고 있고, 두 그루의 난초에 집착하고 있어 괴롭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친구분에게 선뜻 선물해 주고 나니 해방감을 느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무엇이든 소유한다는 것은 소유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해서 뭔가를 갖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에 신경을 쓰며 얽매인다. 적게 갖을수록,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을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영혼이 맑아짐을 느낀다. 매일 한가지씩  사용하지 않는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거나 버리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법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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