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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의 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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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2-11-01 09:28

곽선영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여자와 만난 곳은, <상담소>라는 작은 팻말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그저 낡은 오피스텔이었을 공간이었다. 창 너머로 환하게 피어난 백목련 외에는 딱히 눈길을 줄 곳이 없을 만큼 실내는 휑했다.

-    어서 오세요. 이메일로 예약하신 윤해진 님이시죠?

나는 “혜”를 아무 고민없이 “해”라고 발음하는 눈 앞의 여자를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미스코리아 머리’ 에, 취향이 그런 것인지 넉넉한 체구를 가리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덜거린다는 표현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롱드레스, 명치께까지 늘어뜨린 보랏빛 원석 목걸이, 거기에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 그러고 보면 살면서 만난 사람 중 “혜”를 제대로 발음해서 내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전남편 뿐이었다. 그것은 비혼주의자였던 내가, 유학생활 중 한인교회에서 만난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확성. 꼼꼼함. 세심함. 혜를 해가 아닌 혜로 발음하는 이 남자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그런 소양들을 갖춘 사람일 것 같았다. 과연 그는 정확하고 꼼꼼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몇 달 같이 살다보니 그는 깐깐하고 예민하고 집요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내 선택에 책임을 다하겠다며 꾸역꾸역, 3년을 더 버텼다. 그러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 그가 먼저 이혼을 요구해 왔다. 깔끔하지 않은 집안과 말끔하지 않은 나를 더는 못 견디겠다며.

-    이쪽으로 앉으세요. 차 한잔 하시면서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얼그레이 밀크티 그리고 히비스커스 티가 있는데, 어느 걸로 드릴까요.

-    아… 저는 커피를 가져와서요….

작은 라운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자와 비스듬히 마주 앉았다. 텀블러에 들어있는 건 커피이기만 한 건 아니었고, 깔루아를 오분의 일쯤 섞은 커피칵테일이었다. 초면에 속엣말을 나누기가 어색할 것 같아서 생각해 낸 방법이었는데 예상보다 술 냄새가 강하게 올라와서 나도 모르게 코를 찡그렸다. 여자는 평온한 얼굴로 히비스커스 향을 음미하며 내 이야기를 기다렸다.
-    그러니까,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들어갔는데… 너무 힘드네요. 우울증도 심해지는 것 같고….

한국에 돌아오던 날, 공항에 나온 혜영언니는 갓 이혼녀가 된 나보다 더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새 큰 애가 돌도 안 된 제 동생을 괴롭혀서 가뜩이나 힘든데, 엄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    아버지 일로 화를 냈다가, 아버지가 치매 걸린 것 같다고 울다가, 어휴. 너도 알다시피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게 치매잖니. 외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치매로 몇 달 고생하셨던 게 트라우마가 됐겠지. 그래서 말인데. 넌 프리랜서니까 꼭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네가 내려가서 당분간만이라도 같이 지내면서, 엄마 그러실 때마다 좀 달래드려. 진이 너 양희 할머니 알지? 동네에서 엄마랑 제일 친하셨던 분. 그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것도 하필이면 치매 증상을 보이시다가. 그 후로 엄마가 너무 외롭고 뭐 그렇다 보니 아버지를 들볶는 것 같기는 한데. 진이 네가 가서 한번 잘 살펴봐, 혹시라도 아버지가… 어… 괜찮으신지.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본가에 도착했을 때, 카랑한 목소리가 현관 너머까지 파편을 튀기며 쨍하니 귓가로 달려들었다.

-    아니 이 양반이 치매가 왔나, 시키지도 않는 일을 굳이 하다가 이 사단을 내고!

엄마는 걸레로 부엌 바닥을 벅벅 문지르곤 이내 걸레를 패대기치면서 몸을 일으키다가 나를 발견했다.

-    어머, 너 어쩐 일이니.

-    지난 주에 전화 드렸잖아요, 저 오늘부터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라고.

엄마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마침 내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들어서던 언니도 한 마디 거들었다.

-    엄마, 저도 그저께 전화 드렸잖아요. 제가 진이 데려다 주러 같이 온다고.

그제서야 엄마는, 아 그랬지, 저 양반이 정신을 빼놓는 통에…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리며 다가와서 내 가방을 반쯤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아버지는 왔니, 한마디만 하시고는 슬쩍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꺼내 무셨다. 점멸하는 담뱃불은 창 너머를 물들이기 시작한 노을빛과 닮아있었다.

아버지는 확실히 변했다. 은퇴 후 출근처럼 하시던 기원 출입도, 매주 가시던 낚시동호회도, 매달 가시던 등산행도 전부 관두고 거의 온종일 집에만 계셨다. 일과라고는, 되도록 엄마의 눈에 띄지 않기로 한 사람처럼 서재에 주로 머물면서 바둑방송 아니면 낚시방송을 보거나 몇 주치 신문을 쌓아두고 읽는 게 전부였다. 가끔은 설거지나 빨래 정리 같은 집안일에 손을 대셨는데, 그 또한 예전의 아버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와 더불어 말수 또한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아버지의 줄어든 말수를 채우듯 엄마의 넋두리가 늘어있었다. 나중에 쓰려고 꺼내 둔 물건을 아버지가 물어보지도 않고 치워버리는 것도 짜증 나고, 평생 안 하던 집안일을 한다며 도리어 어지르기만 하는 것도 화가 나고, 자꾸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물어보는 것도 귀찮고, 무슨 얘기를 하면 잘 못 알아듣고 멍하니 있거나 입 꾹 닫고 있는 것도 불쾌하고, 등.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얘기는 때로 매정한 자식들 원망을 거쳐 지난한 시집살이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불우했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    아이고,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런 환경에서는 우울증 없는 사람도 견디기 힘들 텐데. 

여자가 난데없이 트럼프 카드 같은 것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엎어 놓고 쭉 펼치더니, 순식간에 그 중 몇 장을 골라서 그림이 그려진 면이 보이게 뒤집어 놓았다.

-    여기 벼락을 맞아 부서진 탑 보이시죠? 역방향으로 나왔구요. 그 옆은 운명의 수레바퀴인데 이것도 역방향이네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 내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위기를 나타냅니다. 그 다음, 거꾸로 매달린 남자. 이건 카드가 주는 조언인데, 이 시간을 버티고 견뎌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라는 의미이기도 해요.

-    네? 아, 네… 그런데 저… 갑자기 웬 카드인지…

여자가 말간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가에 서려있던 잔잔한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    타로카드예요. 타로 상담 받으러 오셨으니 카드를 펼쳐본 거죠.

-    타로…요? 그건, 점 보는 거 아닌가요?

여자의 미간이 아주 잠깐, 아주 살짝, 구겨졌다.

-    점이라뇨. 듣기 거북합니다. 타로는 심리상담에 쓰는 도구예요. 1920년 대에 나온 로샤 검사라는 게 있는데, 같은 원리죠. 검색해보세요, 로샤. 아, 그리고. 치매 검사 받으셔야 해요. 아버님 말고, 어머님. 여기, 어머님을 상징하는 카드로 달 카드가 나와서 드린 말씀이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날씨가 추워지면서, 서재 문은 여닫을 때마다 삐익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꽉 닫혀있던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창 밖으로 지는 노을이 보인다. 베란다에서 잠깐 보자꾸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덤덤하지만, 왼손에 꼭 쥔 의사소견서는 형편없이 구겨져 있다. 베란다 문을 닫으며 돌아서는데, 난간을 꼭 붙들고 선 아버지의 뒷모습이, 문득, 참 작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베란다를 스친다. 여름 내 베란다에 방치되었던 행운목의 시든 잎들이 가늘게 앓는 소리를 낸다. 아부지, 혹시 짐작하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내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넨다. 늘 자기 전에 꼭 재떨이를 비우는데, 아침에 보면 꽁초가 한두 개씩 있더구나. 나도 말없이 담배를 받아든다. 처음에는 느이 엄마가 물건을 엉뚱한 데 두기도 하고 자꾸 날짜며 시간을 착각하길래 그냥 건망증이 심해지나보다 했지. 그런데 어쩌다 한번씩 하는 행동이나 말이, 아무래도 이상한 거라. 치매의 치읓 자만 꺼내도 길길이 뛸 테니 검사 받자고도 못하겠고. 혹시나 싶어서 내가 집에 붙어있기라도 하자 생각했던 건데. 막상 이렇게 확인을 하… 아버지는 말을 맺지 못한다. 검버섯 핀 손등 위로, 그보다 더 짙은 눈물 자국이 점점이 핀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만 같아 얼른 눈을 돌려 하늘을 본다. 하늘에 검붉은 얼룩이 온통 퍼져있다. 그것이 내 눈물 때문인지 땅거미 때문인지, 나는, 보고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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