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가 끝나면 종종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가곤 했다. 시장 어귀에 자리 잡은 떡볶이집은 허름한 건물 일 층에 있었다. 주문한 떡볶이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페인트칠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누추한 벽에 삐딱하게 걸린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사장님이 직접 쓰신 산문시였다. 고생 끝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곤히 잠든 식구들을 내려다보며 상념에 잠겨 쓴 가슴 뭉클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인간의 삶 속에 깃든 소박한 애환을 시에서 느꼈던 것 같다. 떡볶이의 맛과 정확한 시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편의 시가 어린아이의 마음에 남긴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집이란 주거 공간 그 이상이며,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따뜻한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시는 말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떠나와 십 년 가까이 렌트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는 이곳에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갖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언제든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가 있는 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는 것은 무리수에 가깝다고 느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딸들에게 좀 더 안정된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남편과 상의하고 캐나다에 집을 마련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펜대믹 시대에 주택 수요가 늘어나면서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로 고개를 들었다.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작은 집을 갖게 되었다.
열쇠를 넘겨받고 집을 둘러본 후 남편과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집을 사면 그것으로 고민이 끝날 줄 알았는데 이 집을 어떻게 고치고 바꿔서 우리가 원하는 집으로 만들 것인지가 큰 숙제로 다가왔다. 한국에 있었다면 쉽게 남의 손을 빌려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한국이 아니었고, 우리는 이미 집을 매입하는데 계획한 예산을 초과한 상태였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원하는 만큼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발 품을 팔고 자급자족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도와준 친구들이 없었다면 이 과업을 완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닥부터 벽, 천장, 조명, 문고리 하나까지도 닦고 조이고, 바꾸어 우리 집은 새롭게 태어났다. 노동으로 손가락이 굽고 손톱이 뭉툭하게 닳을 수 있다는 생소한 경험에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느 것 하나 맘대로 되는 일은 없었지만, 우리 가족은 캐나다에서의 첫 집을 그렇게 갖게 되었다. 사계절이 담긴 흑백 사진을 걸고, 꽃을 사서 볕이 잘 드는 창 앞에 두었다. 햇살이 집안을 환하게 비추고 따뜻한 기운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한참을 조용히 앉아있었다. 나의 손끝에서 완성된 새로움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고 원래 있던 것처럼 편안했다. 집이란 나와 내 가족의 소중한 추억과 일상의 감동이 기록될 한 권의 책처럼 느껴졌다. 그 첫 페이지를 펼치며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집착하지 않고, 이곳에서 인생을 온전히 즐기고 향유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모든 것이 특별해지는 공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생산해 내며, 지치고 아픈 영혼이 신의 자비와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집을 꿈꾸며 나는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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