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사는 집을 떠나 가장 편안한 장소를 꼽는다면 단연코 목욕탕이 아닐까. 타국에서 오래 머물다 고국에 들어가면 어색한 부분들이 많은데, 그런 이질감을 금시 씻어 주는 곳이 목욕탕이 으뜸이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피부로 느끼고 한국문화에 금방 동화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가한 시간, 적당히 뜨거워진 탕에 목만 내 놓은 채, 한 사람씩 들어오는 모습을 관찰해 보는 것이 여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사람 얼굴만큼이나 신체 부분도 제 각각이고 거시기도 천차만별이다. 마음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유독 많아진 세상살이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표정은 그늘져 있고, 찬바람이 휑하니 스쳐 가고 있음을 탕 안으로 들어오는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어쩜 저들은 육체의 때를 벗기기 보단 마음에 상처를 씻으러 이 곳을 찾아온 게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로 그 곳에 오래 머무는 시간들이 잦다.
내가 처음 목욕탕을 갔던 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사촌형님 집에서 기거하며 유학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한 날 아침 사촌 형은 목욕탕엘 데리고 갔다. 꾀죄죄한 내 몰골을 본 형님은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기 전 때 자국이라고 씻겨 집에 데려가려는 형의 배려임을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처음 목욕탕에 들어가 어쩔 줄 몰라 망설이는 내게 형은 어서 옷을 벗으라고 재촉했다. 그 때의 난감함을 어디에 비길 수 있을까? 어렸을 적 한 번 밖에 뵌 적 없는 사십 중반의 형님이 옷을 훌훌 벗은 채 내게도 빨리 벗으라고 재촉하던 모습은 문화적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도 형은 탕 속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 날 형님이 참 외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흘끔흘끔 탕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눈치 것 훔쳐보면서. 적당히 몸이 데워지자 형님은 손발부터 등까지 때를 밀어 주더니 낡은 수건을 건네며 당신의 등도 밀어 달라고 하셨다. 이상하게도 형님과 목욕을 하고 나자 어려움이 없어졌고 적잖이 마음이 안정되었다. 큰 사업체를 운영하셨던 형님을 만날 수 있는 휴일이면 어쩌다 목욕탕엘 갔는데, 형님과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목욕탕은 내게 어느 장소보다 내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독립을 하겠다고 형님 집을 나와 신문배달을 하며 지낼 때였다. 내 구역은 약수동과 금호동을 있는 고갯길 주변이었다. 남는 신문을 목욕탕에 가끔씩 넣어 주곤 했는데,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도 하고, 휴일 날 공짜로 목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 좋은 날은 주인아주머니가 뜨거운 옥수수차를 한 잔씩 주어 혹한에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탕 속에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경제 주간지에서 읽었던, 한 비뇨기과 의사가 쓴 칼럼이 생각났다. "남자의 그것에 자신이 있는 사람은 목욕탕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탕 속을 활보 한다"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모든 남성들은 한 결 같이 어깨가 축 처져 있다. 그렇다고 다들 그것이 빈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중년 남성의 설 자리가 그만큼 좁아졌음을 은연중 엿볼 수 있을 뿐.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낭설에 대해 이 지면을 통해 그 진실을 밝혀 두고자 한다. "코가 크면 거시기가 크다"라는 그 루머는 전혀 사실 무근임을 밝혀 두고자 한다. 큰 코만 보고 부러워했다가 여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코가 얼굴 전체를 가릴 정도로 크고 우람하였으나 그건 아주 형편없었고, 영 볼품이 없었다. 저걸로 무슨 작업을 한단 말인가? 쯧쯧. 그것을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던가, 남성들이여 낭설에 기죽지 말고 당당해 질지어다. 또 여성들이여! 헛된 소리에 절대 속지 말지어다.
중략-
우리는 배꼽 위에서 평등하다.
그것은 생일날의 흉터,
고아들의 패찰,
인광을 칠한 백골의 주황색 입술이
아삭아삭 제일 먼저 뜯어먹는 온순한 육체의 이삭,
우리는 배꼽 위에서 너무나 평등하다.
김승희의 시, 배꼽을 위한 연가 중에서
목욕탕에 올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르는 것은 내 상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온갖 형식으로 치장한 면면들을 벗어 버리고 인간본질의 참 모습들을 만나는 곳, 거기엔 분명 신분의 차별이 없는 지상낙원이 틀림없다. 하여 틈만 나면 나는 그 파라다이스를 찾는다. 풀리지 않은 일상의 문제들을 진지하게 돌아 볼 수 있고, 명상을 통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최고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아! 목욕탕! 명상 속 미학이여! 난 행복하다. 이런 좋은 문화 속에 살고 있음이. 나는 또 시간이 나는 대로 탕 속에 목만 내놓은 채,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내 관찰의 대상이 되어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아래층 여자 목욕탕에서는 지금 어떤 모습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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