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 (사)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오늘은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이다. 저녁 준비로 동동대는 내 옆에서 남편은 어느 때보다 협조적인 자세로 하명을 기다리고 있다. 청소기를 돌리고 거실 유리창을 닦고 바베큐 그릴도 달구고… . 바쁜 가운데 손발이 맞는 손님맞이는 수월하게 마무리가 되어 간다. 오늘 손님은 같은 해 밴쿠버에 정착해 한동네에 살던 유고인 프레드락과 수잔나 부부이다. 연배가 비슷한 우리는 긴 세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일상의 애환을 나누고 살아온 귀한 인연이다. 샴페인 잔을 들어 이민 30년에 대한 각자의 뜻깊은 소회를 말하고 음식과 밀린 정담을 나누는 시간이 밤늦도록 이어진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공자님께선 멀리서 내 집에 찾아오는 친구에 대한 반가움을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쁨이라고 설파하셨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서로 교류하며 우의를 나누는 풍속에 일찍이 삶의 방점을 찍으셨다. 그 옛날 3대 대가족이 모여 살던 우리 집엔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셨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대문을 밀고 불현듯 안마당으로 나타나시는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곤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어른들은 손님이 언제 가실지 묻지 않았다. 고기반찬을 상 위에 올리는 부산스러움도 없었지만, 빨리 가기를 바라는 소홀함도 없던 인정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밤 멍석 옆에 모깃불을 피우고 손님 곁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얘기꽃을 피울 때면 달빛보다 환한 박꽃들이 잿간 지붕을 덮고 있었다.
이제 시대가 변해 주거 형태가 바뀌고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의식 구조는 손님이 온다고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실정이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와 개인주의, 결혼과 출산율 저조, 고령화 등으로 1인 가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 방문 때 공유주택인 청년층을 위한 기업형 코-리빙 하우스(Cooperative Living House)와 지자체 지원 노인 복지주택이 텔레비전 뉴스에 소개되었다. 한 지붕 아래 1인 가구들이 모여 사는 공유 주택은 경제적 부담이 적고 안전과 편리가 보장되며, 생활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새로운 주거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도시 지역에 따라 세대수가 다른 코 리빙 하우스는 크기가 다른 개인 방과 공유공간인 주방, 세탁실은 물론 소규모 회의실, 헬스장, 도서관, 영화 감상실, 카페 그리고 파티를 할 수 있는 개방형 옥상까지 획기적인 설계로 지어진 건물이다. 150명이 거주하는 한 지자체 지원 노인 복지 아파트 역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한 동작 감지 센서가 달린 개인 방과 건강 관리실, 다목적 문화 강당, 영화관, 찜질방, 경로식당 등 맞춤 설계의 넓고 쾌적한 공유공간이 돋보인다.
전문적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 시공된 공유주택의 다양한 공간은 이웃끼리 서로 어울리며 관계를 넓힐 수 있도록 잦은 만남을 유도한다. 건강하게 혼자 살기 위해선 더불어 사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며, 적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성장하는 이웃이 이제 의식주 다음으로 필요한 시대이다.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그늘과 같은 공유 공간은 생활 정보와 건강 관리법, 조리법과 여행담 등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대화의 장이다. 나와 다른 관점을 이해하고 반응하며 마음을 열다 보면 이웃들은 어느새 일상의 밀도를 높이는 조력자가 되어간다. 물론 개개인의 공동체 의식과 책임감은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며, 규칙을 위반한 입주자에게는 거주 후 평가를 통해 벌금과 퇴출이 적용되기도 한다. 미래를 향한 1인 가구의 대안인 공유 주택은 삭막한 도시에서 개인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휴식 공간이며, 불안과 두려움이 불러오는 위기의식을 더는 사회 안전망이다.
날이 저물어 새들도 포근한 둥지로 돌아가는 시간,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오른 듯 지친 몸과 마음을 끌고 낯익은 골목길로 들어서면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환하다. 그 안온한 불빛은 언 몸을 녹이고 매듭진 가슴 속에 박힌 응어리를 어느틈에 사라지게 한다.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처럼 익숙해진 이웃들은 오늘도 사소한 화제에 귀 기울이며, 평범한 일상에 삶의 진실이 숨어 있음을 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들이 모여 든든한 돌담을 쌓듯, 저마다 자기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모여 따로 또 같이 빈틈을 채워가며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곳. 먼 곳에서 날아온 씨를 품어 싹을 틔우는 흙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이곳에서 그들은 슬프고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 발길을 재촉해 가는 그곳이 이제 우리 집이다. 허기진 마음에 지지를 보내는 그들이 있어 나는 자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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