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죽기 위해 병원에 들어온 환자. 그 환자에 대해 보고받은 순간, 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물론 병원에 들어온다고 모든 환자가 살아 나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살기 위해 입원했고, 우리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이 환자는 죽기 위해 들어왔다. 그것도 내일. 죽는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다.
2016년 캐나다에도 MAID(Medical Assistance in Dying, 조력사)가 합법화되었다.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의학적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태일 때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합법화되었다. 간호사로 일한 오랜 경험으로 봤을 때도 자연 순리에 두어야 할 죽음이 고도로 발달한 의료기기로 인해 지나치게 간섭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 또한 이미 변호사를 만나 연명치료 중단에 사인을 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조력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거였다. 불치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가 죽겠다는 확고한 의사표현을 하면 의사가 약물을 주입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게 조력사였다. 물론 그 자리에는 의사와 간호사 두 명이 동석해야만 한다. 환자가 확고한 결행 의사를 표현할지라도 한 달여의 숙려기간을 거친 다음에야 이 조력사는 실행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이 조력사를 받기 위해 들어온 환자였다. 입원 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간호사정도 그에겐 할 필요가 없었다. 내일 죽을 사람이기에 그 사람에 대해 알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난 겉모습만으로 그를 파악했다. 휠체어에 앉은 60대의 정신이 말짱한 사람, 이게 내가 파악한 그였다. 몸이 굳어가는 불치병으로 고통받고 있다지만, 병동엔 그 환자보다 더 심한 환자도 입원해 치료받고 있었다. 그러니 난 그 환자의 결정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의사로부터 내일 10시에 실행할 거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도, 난 그 정보마저 환자에게 전하기가 싫었다. “내일 10시에 검사하러 가요. 수술하러 가요.” 등의 희망 어린 정보는 많이 전해봤지만, 이건 뭐라고 하지? “내일 10시에 죽여 드릴게요.”라고 해야 하나? 한참을 망설이던 난 그 환자의 방으로 들어가 눈 마주치기를 피한 채로 “스케줄이 내일 10시로 잡혔어요.”라고 말한 후 도망치듯 병실을 나와 버렸다. 그와 만났지만, 눈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기에 우린 만나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로 난 그 환자를 철저히 외면했다. 다음날 10시, 간호사들의 동석 거부로 응급실에서 다른 간호사를 데려와 의사가 조력사를 실행했다. 그런 후 밖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장의사가 들어와 시신을 관에 넣어 나가는데, 난 그마저도 불편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한 것만 같아, 난 차가운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외면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밴쿠버에 사는 아주 가까운 친구인 론이 조력사를 선택했다는 소식을 언니가 전해왔다. 그가 폐섬유화증으로 상당 기간 고생하고 있는 걸 알았기에, “폐 기능이 얼마나 남았는데?”가 나의 첫 질문이었다. 30% 미만이라는 언니의 대답에 난 그가 겪고 있을 고통을 가늠해봤다. 숨 못 쉬는 고통은 공포와 동반되는 것이기에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였다. 우울한 고립감, 기침, 흉통, 호흡곤란 등 그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15년여를 친구로 지낸 론과는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고, 로키 여행을 함께 하고, 셀 수 없는 추억이 쌓여 있었다. 유머가 풍부하고 항상 활기차서 그와 함께라면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필요할 때면 경륜이 많은 사람답게 현명한 조언을 해주던 친구. 그답게 사는 게 어떤 모습인지를 잘 알기에 친구인 우리는 그만 평화롭게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그의 결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를 보내기 위해 40여 명의 친구들이 모여 마지막 파티를 열었다. 앨버타에 사는 난 갈 수가 없어 영상통화를 했는데, 병색이 짙은 얼굴로 숨이 짧아 한 문장도 끝까지 뱉질 못하는 론이 측은하고 애처로울 뿐이었다. 그가 살면서 했던 선택에 내가 비판을 가한 적이 없듯, 그의 마지막 선택도 그대로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말 저말 끝에 결국 마지막 인사할 시간이 다가왔고, 난 ‘Goodbye.’를 “Love you.”로 대신했다. 그렇게 우린 마주 웃으며 이별했다.
시간이 지나, 조력사를 선택한 두 사람을 대했던 나의 온도가 왜 그리 달랐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첫째는 두 사람에 대한 나의 이해가 확연히 달랐다. 론의 고통은 공감하면서도, 그 환자의 고통은 몰랐다. 사실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게 그의 선택이 내가 지닌 종교적 신념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두 번째 이유였다.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태어날 때 내가 관여하지 않았듯, 죽을 때도 자연 순리에 따르고 싶다는 게 나의 바람이다. 하지만 내가 지닌 신념이 이렇다고 할지라도, 그 환자를 차갑게 외면한 건 옳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가 조력사를 선택하진 않을지라도, 이제부턴 내 주위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인간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게 새삼스러운 일 같지만, 사실 인류사를 보면 후손들의 생존을 위해 무용해진 노인이 자발적 죽음을 선택한 경우는 허다했다. 한국에도 당장 고려장이 있었다. 그 모든 자발적 죽음을 내가 함부로 비판할 수 없듯, 지금 조력사를 선택하는 사람들도 비판할 권리가 내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톱 밑에 가시만 들어가도 너무 아파 고통스러운데, 하물며 불치병의 고통이야! 참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다 그런 결단을 하기까지 그 환자가 얼마나 힘든 여정을 왔을지, 그 고통을 맘 아프게 바라보며 따뜻하게 보내드렸어야 했다. 마지막 파티를 하던 날, 40여 명의 친구들이 왁자지껄한 웃음으로 론을 따뜻이 감싸 보냈듯이, 내게 진짜 필요한 건 날 선 비판이 아닌 바로 그런 따뜻함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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