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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떠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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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3-05-15 08:40

민정희 / 사) 한국문협 벤쿠버지부 회원
  “엄마 우리 떠나요.” 저녁 늦게 퇴근한 딸아이가 현관문을 들어서며 외친다. 오늘 회사를 퇴직했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예약해야지?” 두서없는 물음표가 튀어나오며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 떠나자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출렁거린다. 아직 방학을 안 했고 평일이니 캠프장에는 자리가 있다고 한다. 남편과 아들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지하실로 내려간다. 한 번도 쓰임을 받지 못하고 고스란히 먼지를 쓴 채 박혀 있던 텐트를 찾기 위해서다. 캐나다로 이민 간다고 결정했을 때 제일 필요할 것이라고 준비했던 물건이 바로 4인용 텐트였다. 아마도 여름이면 캠핑을 가고, 때마다 넓은 땅을 여행하며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리라.
 
  예기치 않게 회사를 옮기게 된 딸아이는 먼저 회사의 마무리가 늦어지게 되어 며칠의 여유도 없이 새 회사로 출근하게 됐다. 그동안 휴가도 못 쓰고 일에 매달렸던 만큼 자신을 위한 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번에 졸업한 아들 역시 다음 주부터 새 직장으로 출근해야 하니 내일 떠나지 않으면 이번 여름의 가족여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벌여놓은 집 안팎의 작은 공사들, 변경하기 힘든 내 스케줄과 맞물려 공동의 빈 시간을 짜 맞추어야만 한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이 나의 발목을 잡으니 떠나려는 마음이 결코 편치만은 않다.
 
  가스버너와 코펠, 라면과 냉장고에 있는 재료가 준비의 전부다. 밤새도록 머리를 맞대고 인터넷으로 찾은 캠프장은 샌드 뱅크이다. 토론토에서 동쪽으로 2시간 반 정도 차로 가다 보면 킹스턴 못미처 자리 잡은 샌드뱅크스 주립 공원이 나온다. 그 공원의 서쪽 호수에 접하는 샌드 뱅크는 길이가 8km에 달하는 산처럼 쌓인 모래 언덕이다. 그 너머로 대장정의 호수 비치가 펼쳐지며, 바다 못지않게 깨끗하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으로 유명하다. 온타리오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해변이다.
 
  모래로 만들어진 긴 언덕은 낮은 산을 오르는 듯하고 사막을 걷는 듯도 하다. 맨발로 걸어보니 밀가루를 밟는듯한 부드러움이 머릿속의 번잡함을 지워주고 마음마저 평온하게 만든다. 투명한 속내를 드러내고 잔물결 치는 호수 속에 눈을 맞추니 동해안 어디쯤 와있는 듯한 착각 속으로 빠져들게도 한다. 처음엔 온타리오 호수였으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파도에 의해 쓸려온 모래는 천여 년의 긴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 호수를 가르는 둑이 된다. 그 위에 온갖 풀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대지를 형성하며, 드넓게 펼쳐진다. 그로 인해 또 하나의 호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거대한 자연은 유구한 세월의 강을 타고 서서히 이동하며 스스로 변화한다. 빗물의 낙수가 바위를 뚫듯, 극히 일상적이고 반복되는 파도는 시간의 더께에 따라 대지를 만들고 깎고 부수며 그들만의 역사를 창조한다. 그에 비해 인간의 삶은 하나의 점과 같이 찰나임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미래를 꿈꾸고 설계하며 다가가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 꿈은 요원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먼 시간을 돌아 지금 그 자리에 와있다고 해도, 미처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스쳐 보낼 때가 있다. 그동안 조바심 내고 집착하며 자신을 괴롭혔던 번민의 부피가 조그맣게 줄어든다. 떠나므로 무거웠던 마음조차 가벼워진다. 그래서 여행은 치유이며 위로가 되는 걸까.
 
  넷이 둘러앉아 모닥불을 피우고 소시지와 마시멜로를 구워 먹는다. 모기와의 싸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렁이는 불빛 사이에 비친 얼굴들은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상기되고 즐거운 표정들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노는 날이 없는 비즈니스 때문에 자유롭게 여행에 시간을 내지 못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아이들 각자의 생활이 바빠 시간을 못 맞추니, 넷이 뭉쳐 떠날 기회가 참으로 드물었다. 더구나 이곳 캐나다에서의 가족 캠핑은 처음이 아닌가. 가족 모두 묵혀 두었던 텐트를 십수 년 만에 사용할 수 있어 감개무량하다고 한다.
 
  별이 뜨기를 기다린다. 하늘이 가까워진 듯 별들이 크게 보인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찾는다. 밤의 정적 속에 귀 기울여본다. 나뭇잎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뭔가 텐트 위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 동물들이 먹이를 찾는 소리는 우리가 가족임을 새삼 확인하며 밀착시키는 계기가 된다. 머지않아 아이들은 각자의 보금자리로 떠나게 될 것이다. 과연 몇 번이나 더 이렇게 네 식구 둘러앉아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 온다. 언젠가 우리 각각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답게 기억할 것이므로.
 
  낯섦과 설렘이 묻어있는 `갑자기’. 행복과 불행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왕이면 연락 없이 찾아온 친구의 방문이거나 긴 겨울의 끝 어느 날 활짝 몸을 열은 목련꽃과 같이, 기쁨을 주는 `갑자기’였으면 좋겠다. 가끔은 촘촘한 일상의 그물을 찢고 느닷없이 떠나 보는 `갑자기’도 괜찮지 싶다. 한여름에 소나기와도 같은 촉촉한 시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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