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욱 / (사)한국문협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그날은 여행 일정이 빡빡하여 좀 늦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시내로 나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오니 거의 자정이 가까웠다. 피곤을 잊으려고 잠을 청하였으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이곳 길고 긴 세상살이를 듣고 나도 캐나다에서 겪은 이야기들로 새벽 두 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 식사 후 동트기 전에 먼저 콜로라도강의 걸작으로 알려진 말굽 협곡(Horseshoe Bend)를 돌아보기로 했다.
어제 다녀온 모뉴먼트 밸리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페이지라는 도시가 있다. 인구 7,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지만, 미 서부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르는 관광도시다. 나바호 땅의 또 다른 보물인 앤틸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으로 가는 길목이자, 호슈 벤드(Horseshoe Bend), 글렌 캐니언(Glen Canyon), 내추럴 브리지(Natural Bridge)와 같은 멋진 자연유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애리조나주, 유타주, 뉴멕시코주에 걸쳐 있는 나바호의 땅을 여행한다는 것은 이 거대하고도 황량한 땅의 오랜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바호족의 가장 성스러운 땅,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에 도착하면 붉은 사막 위 요새처럼 솟은 바위들, 오랜 세월 속에서 메마른 땅을 정교하게 조각한 거대한 강줄기, 지구의 결이 고스란히 새겨진 협곡을 지르며 미국 속에 감춰져 있던 순수한 땅, 그리고 그 땅과 꼭 닮은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인 것이다. 특히 오늘 일정에 잡힌 호슈 벤드(Horseshoe Bend)는 콜로라도강이 사암 고원을 침식해서 만들어낸 빼어난 절경이다.
날씨가 더워지기 전 부지런히 홀스슈 벤드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른다 싶을 때쯤 저 멀리 절벽의 시작점이 보인다. 절벽 끝에 다다르자 엄청난 풍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깊이만 300m에 달하는 수직 절벽 아래 펼쳐진 편자 모양의 협곡을 신비로운 빛깔의 강물이 부드럽게 감싸 흐른다. 홀스슈 벤드는 그랜드 캐니언을 조각한 콜로라도강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작품이다. 이 거대한 강줄기는 수많은 세월을 굽이치며 말발굽 모양의 협곡을 완벽하게 조각했다.
홀스슈 벤드의 가장 아름다운 때는 일출과 일몰이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제대로 일출을 감상하기로 한다. 별다른 안전장치가 없어 절벽 주위를 걸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해가 한 뼘씩 차오를 때마다 마법이 펼쳐진다. 협곡 중앙의 붉고 짙었던 바위는 오렌지색과 핑크빛을 띠고 강물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인다. 거대한 원형극장에 홀로 앉아 세상 모든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스크린 속에서 수없이 봐온 풍경이니 실제로도 그러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마주한 모뉴먼트 밸리를 보자 그간 상상했던 모든 이미지는 사라져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붉은 대지 위로 장엄하게 서 있는 바위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이었다.
모뉴먼트 밸리를 떠나기 전 우연히 나바호족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등의 시시콜콜한 인사였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니 피부는 구릿빛이 돌고, 눈가에는 오래된 나무의 결과 같은 주름이 깊게 패었다. 손은 투박하지만, 바위처럼 두툼하고 단단하다. 그러고 보니 나바호족 사람은 그들의 터전인 이 붉고 아름다운 땅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하게 되었다.
Sa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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