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봉 /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자동판매기 버튼을 눌렀다. 캔 음료가 나오기 전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여 음료수가 나오는 통로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 기다리니 덜컹하며 내 손에 잡힌 음료가 갈증을 풀어주었다. 자동판매기 앞에서 난 매번 필요 없는 동작을 한다. 커피 자동판매기에서도 버튼을 누른 후 커피가 다 채워지기 전에 손을 먼저 넣어 뜨거운 커피가 손 등에 흘러 데인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습관은 공공기관 서비스 안내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안내 내용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미리 앞의 중요하다고 판단한 내용만 듣고 끊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식당에서 음식 주문할 때도 역시 단순하고 빠르게,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것으로 빨리 달라고 주문한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버린다. ‘무엇이든 빨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였다.
중학교 체육 시간에 단체 기합을 받았었는데, 운동장 한 바퀴 돌아 선착순으로 들어 오는 학생 10명만 벌을 면제받았었던 적이 있었다. 11등으로 들어온 나는 너무 억울해하며 단체기합을 받았었다. 그 이후 뭐든지 빨리빨리 하는 것이 최고이고, 늦으면 손해 본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요점 정리가 잘 된 참고서로 빠르게 암기하는 요령을 터득했고, 숙제와 시험지도 무조건 일등으로 제출하려고 노력했다. 대학 진학 후에도 소위 ‘족보’라는 선배들의 시험 정보를 얻어 남보다 빨리 시험 준비를 마쳤고, 교과서를 통독했던 친구들보다 학점을 더 잘 받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기획 부서에서 일할 때 신입사원의 주요 업무는 보고서 제출이었다. 당시 보고서 형태는 빠르고 간편한 ‘One Page Best’, 이었다. 간결한 요점 정리와 암기, 그리고 빠른 보고서 제출, 이런 나의 장점을 살려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한 덕에 상사로부터 인정도 받고 고속 승진도 하게 되었다.
승진 후 다국적 회사와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 국외 파견근무를 나간 적이 있었다. 난 출국 전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고, 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고 내심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팅 첫날 프로젝트 전반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는 시간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주제 중심으로 중요한 내용만을 간결하게 요약해서 철저히 준비했었다. 발표가 끝나고 질의질문 시간에 나의 예상과는 달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간과했던 부분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순간 등에 땀이 나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고, 난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실망한 나는 호텔로 돌아와 밤새도록 모든 서류를 다시 점검해야만 했다. 하루를 꼬박 걸려 다시 수정한 서류를 파트너들과 교환하고 나서 바로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편 회사에서는 서류검토 하는 데에만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알려주었다. 난 하루 만에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일주일이나 걸리는지 의아해하며 재차 빠른 답을 요청했다. 그들은 모든 서류를 자세히 검토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재촉하는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듯하였다. 내가 지향하는 요점정리식 빠른 업무처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업무 스타일이었다. 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조바심과 긴장감으로 하루하루가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예상했던 기한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했지만, 다행히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때를 계기로 내 업무방식을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하! 빠른 것만이 최고가 아니구나!
캐나다 이주 후 나의 ‘빨리빨리’ 습관은 완전히 무너졌다. 모든 것이 느리고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생활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었다. 음식 주문을 할 때, 은행 업무를 볼 때, 사업과 관련된 인허가 신청할 때도, 국세청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상담 전화를 연결하려면 한 시간 이상씩 기다려야 했다. 연결되었다 하더라도 담당자가 다르다며 또 다른 담당자로 계속 연결될 때마다 매번 다시 기다려야만 했다. 전화 한 번 하는데 한나절을 낭비해야 했다. 심지어 쇼핑 후 계산대에서 기다리는 것까지도 모든 일에 긴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불만이 가득 차 50년 전의 한국과 캐나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과 캐나다의 국격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면서 빠른 업무속도 때문에 한국이 고속 성장했다고 자랑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시간 경제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예찬하곤 했다. 이런 느린 나라에서 어떻게 답답해서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캐나다 지방 도시에서 호텔사업을 시작하면서 처음에 답답하다고 느꼈던 캐나다 정부의 사무처리 스타일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업무속도는 느리지만 꼼꼼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 같았고, 모든 사회와 경제활동은 아무 문제 없이 천천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빨리빨리’ 스타일에 차차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요즘 호텔 업무의 많은 부분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컴퓨터와 내 손에 늘 함께하는 핸드폰이 대신 해주고 있다. 더욱이 공공기관 전화 통화로 많은 시간을 소비했던 대부분의 업무가 개인 인터넷 접속으로 신속하고 간단하게 일 처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일 처리 속도보다 훨씬 빠른 기계들이 우리의 일을 대신 해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과거 온종일 전화를 붙잡고 일에 투자했던 시간은 줄었고, 그로 인해 남는 시간을 즐기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어느새 중년을 넘어선 지금, 젊은 시절 악착같이 시간을 쫓아다니던 나의 습관이 ‘천천히 여유롭게’라는 말을 자주 되새기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통신과 인공지능의 발달에 맞추어 현대사회는 매우 ‘빨리빨리’ 변화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나의 손놀림과 두뇌 회전은 그에 비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이제 단순하고 기계적인 업무는 컴퓨터에 맡기고, 천천히 여유로운 인생을 즐길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요즘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감성을 되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인간의 감성 활동에서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느긋한 마음으로 시간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내게 시간적 여유를 제공해 준 고마운 컴퓨터 앞에 앉아서 따뜻한 감귤 차를 천천히 마시며 향긋한 하루를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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