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린 / 캐나다 한국문협 부회장
1
비춰보면
스스로만 늘 추해 보이는
모습이 있었다
흰 여백으로 가득 찬
언덕 위
생명과 목숨이라는 두 인간이
겹치듯 어른거렸고
시작도 끝도 없는 기호들이
표면에 기재되었다
가물가물 아지랑이로
피어나고 있었다
2
허기진 배
물 채우듯
냄새도 색깔도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경고나
결심 따위는 팽개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한없이 너그러워 보이는 그곳
늘
노릿한 바나나 향이 배어 있어서
두통약을 찾다가
결국 엉뚱한 소화제를 찾기도 했다
3
가진 것 없이도 가진 것처럼
겨 묻은 개를 부러워하여
가끔 허공에 대고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야단맞을까 봐
감춰 놓고 꺼내 마시는 독배 한 잔
취하듯 흘러나오는 잔소리는
일종의 중독 증후군
하지만
성배의 약효였다
왜냐하면
한 번 들이키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다가도
매일 환하게
다시 깨어나기 때문이다
4
어느 광대가
홀쭉한 풍선을 하나 꺼내
바람을 불어넣는다
훅...
빵!
터지면서 순간
민들레 물음표로 날다
무수히 하늘하늘
가볍게
점점이 땅에 내리고 있었다
안개 속 거기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당신의 자욱한 프네우마가
서려 있었다
5
그날 오후
숲 속의 작은 오솔길엔
어느 요정이
살며시 나타났다가
쌩긋 웃으며
숲 저 편으로 사라졌다
일기장에 쓰인 글씨는
어느새 증발되고
돋아나는 풀잎처럼
날짜만 파릇파릇 새겨져 있었다
손거울이
바람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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