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아버지의 뒷모습

민정희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12-11 08:51

민정희 사) 한국문협 밴쿠버 지부 회원

 딸아이를 만나러 시애틀에 갔다. 거의 일 년 만이다. 마중 나온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든다. 어색하게 끌어안으며 살가운 냄새를 맡는다. 새로 이사한 집을 둘러본다. 이 많은 짐을 혼자 싸고 풀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하다. 홀로 살아도 갖추어야 할 것은 한 가족이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직도 어린애 같이 느껴지는 딸아이가 또 다른 나라에서 직장 다니며, 잘 적응하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딸아이가 미국으로 직장을 옮기겠다고 했을 때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발 디딘 캐나다 땅에 달랑 네 식구, 외로운 섬처럼 서로 의지하며 뿌리내려왔다. 기둥 하나가 빠져나가는 듯 휘청거렸고, 휑한 공간은 시간이 흘러도 채워지지 않았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으리라 스스로 위안했지만, 한번 보러 가기가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오래전, 나의 부모님도 이런 심정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아프게 묻혀 있던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학교를 그만두고 어릴 적부터 동경해오던 시골 체험을 위해 강원도 산골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강원도 횡성으로 전근 갔던 해 5월이었다. 5월 말의 시골 햇빛은 강렬했다. 거칠 것 없이 내리쬐던 태양은 오후 6시가 되도록 지칠 줄을 몰랐다. 며칠 남지 않은 체육대회를 위해 준비해 오던 매스게임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아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하얗게 피어오르던 운동장 먼지와의 씨름을 끝낸 뒤였다. 밀린 서류를 정리하느라 늦은 퇴근을 할 무렵, 한 학생이 다가와 “선생님 부모님 오셨어요.” 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뭐라고?” 하며 고개를 돌리니 엄마 아버지가 뒤에 우뚝 서 계셨다. 아버지의 한 손에는 그 당시 사정으로는 귀해서 먹어보지 못했던 바나나가 가득 포장된 바구니를 들었고, 또 다른 손으론 백화 수복 두 병이 든 커다란 박스를 들고 있었다. 팔에는 무릎이 안 좋아 잘 걷지 못하는 엄마의 팔이 걸쳐 있었다. 두 분 다 얼굴에 땀이 범벅이었다. 나는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반가움보다는 속상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앞장서라. 교장 선생님 먼저 뵈어야겠다.” 하며 숨 쉴 틈도 없이 몸을 돌렸다. 이미 퇴근한 교장 선생님 댁으로 안내하며 가슴 밑바닥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서울서부터 준비해 왔을 이 무거운 물건을 들고 그토록 먼 길을 왔을 생각에. 난 부모로부터 독립하기에 충분한 나이였고, 나름 능력도 인정받으며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그리도 내가 못 미더웠나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과년한 딸자식을 객지에 홀로 보내 놓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교장 선생님 집을 방문하여 모자란 딸자식을 맡기니 잘 부탁드린다는 말과 인사를 전한 아버지는 바나나 바구니와 정종 박스와 함께 무거운 마음도 내려놓은 듯 보였다. 하숙집에 들른 아버지는 말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물 한 잔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통째로 건네준 바구니에서 바나나 한 송이라도 덜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침 이 집이 학부모 집이고 잘 돌봐 주신다는 말에 다소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방 구들을 유심히 살피시더니 연탄가스가 새는지 늘 신경 쓰라고 했다. 저녁 드시고 가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아쉬워하는 엄마를 재촉하여 일어났다. 지금 떠나야 늦더라도 서울 집에 가서 잘 수 있다며.

 

   아버지는 칭찬에는 과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지만 잘못한 일에는 침묵하셨다. 그 침묵 속에는 어떤 꾸지람보다도 더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은 물론 막내딸인 나조차도 아버지는 어렵기만 한 존재였다. 모두가 궁핍한 시절이었다. 온 나라가 가난으로 신음하던 때 유복자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 어머니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당신에게 다정한 아빠라는 단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빌 언덕도 없이 내던져진 거친 환경에서 오 남 일 녀의 대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켜야 했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무장된 아버지의 존재는 위엄 그 자체였다. 그 꿋꿋했던 위엄이 그날따라 터무니없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구의 몸으로 횡성 땅을 밟은 아버지에게, 살가운 표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허수아비처럼 걸쳐진 양복 속으로, 바짝 마른 몸을 휘적거리며 걸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의 팔에 매달리듯 뒤뚝 뒤뚝 발자국을 옮기던 엄마를 허전한 눈빛으로 좇고 있었다.

 

   딸아이의 체취가 묻어있는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이불 빨래를 한다.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고 아이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며 가슴이 설렌다. 밥만 있으면 간단히 먹을 수 있도록 밑반찬을 준비하며, 시간이 빨리도 흐름에 초조해진다. 엄마가 집에 있어 마음 든든하고 편안하다며 빨리 집에 오고 싶다는 딸아이의 말에 기쁘면서도, 나 떠난 빈자리를 다시 채워야 할 딸아이의 빈 공간이 시리다.

 

   그 옛날,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리도 쓸쓸하게 보였던 이유는, 이제는 딸을 놓아도 되겠다는 안도감과 놓지 못할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모의 마음은 대지와 같으리라. 흙 속에서 씨앗이 움트고 자라며 나무가 되지만, 세상에 나가 추위와 더위, 비바람을 견디며 크고 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나무의 몫이다. 대지는 무엇을 해주려 애쓰거나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해 조바심내지 않는다. 단지 넉넉하게 뿌리를 품어주고 바라봐 줄 뿐이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온갖 우려와 기대는 유리병 속에 밀폐하여, 흐르는 세월에 띄우기로 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질 수 있다면, 내 모습 이대로 아이들 곁에 머물러 있고 싶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조정 (사) 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   대자연의 땅에 사는 가난한 유목민들, 그들은 헤어질 때 언제나 같은 인사말을 건넨다.“길 위에서 다시 만나자.“  '앞으로 어떤 상황에 놓인다 해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서로의 다짐이 실린 말이다.서리 덮인 황량한 평야와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 벼랑 밑으로 넘실대는 파도---, 고립된 외로움을 안고 목적지를 향하는 유목민들은 그 말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영화...
조정
미늘 2021.08.23 (월)
임윤빈 / (사)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단어가 미늘이다. 낚싯바늘에 한번 물린 물고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낚싯바늘 끝에 뾰족하게 갈고리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미늘이다.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올무 같은....   나는 산을 좋아하여 지금도 틈틈이 산행을 즐겨 하지만 실은 바다를 더 좋아한다. 특히 요즈음처럼 코비나로 숨쉬기조차 어려운 이 때에 바다만큼 편하고 좋은...
임윤빈
장등 앞바다 2021.08.23 (월)
백철현 / (사) 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회원 신발을 벗었다양말도 벗어 던졌다걸음마를 하듯 첫발을 내디뎠다발가락 사이로 깨알 같은 얼굴들그 따스한 미소들나는 취한 듯 마구 자유를 휘젓고 다녔다신발을 벗고 양말을 던져버리고 나서야 알았다어찌 벗어야 할 게 신발뿐이랴어찌 던져야 할 게 양말뿐이랴파도는 소금물로  발등을 씻겼다나는 점점 허벅지까지 바닷물에 담근 채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아스름 비껴간 시간들방황의...
백철현
살기 좋은 나라 2021.08.23 (월)
김의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지난 봄에 인터넷을 통해 밴쿠버에서 발행되는 일간지를 보는데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로 캐나다가 선정됐다는 보도가 눈을 끌었다. 이 곳에 살면서 밴쿠버가 새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뽑히는 뉴스는 여러 번 보았고, 매년 4위 안에 드는데, 가끔 1위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스위스 제네바,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에 빼앗긴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그런 가 보다 하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김의원
공터 2021.08.23 (월)
이영춘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무기력으로 떠오른 내가무기력으로 가라앉습니다천둥번개, 내 안의 내력으로가라앉습니다나는 내가 없는 존재를 찾아길을 떠납니다막다른 골목 끝에서천둥소리에 실려 오는 물방울 하나하얀 나비 날개로 날아오릅니다누가 앉았다 돌아간 흔적 없는 공터,웅덩이 같은 빈 발자국에빗방울이 고요히 내려와 앉았다가사라집니다 
이영춘
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벌새는 1초에 90번이나제 몸을 쳐서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벌새가 사는 법/ 천양희)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세 살배기 손주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손잡이가 높았으나 영특한 아이가 까치발로 서서 문을 열었다. 이를 발견한 아내가 바로 뒤쫓아 나갔다. 잠시 후 꽈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주를 안고 나타난 아내의 얼굴에는 선혈이...
이현재
하태린 / 캐나다 한국문협 부회장 ​육신은 시간이 흐를수록 탄력을 잃고 땅 표면에가까워진다 그리고 흙에 묻힌다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불굴의영웅과 천사가 만들어낸 묘약을 마셔야 한다는 것죽은 자의 시신 옆에는 파릇파릇 로제트 식물이땅 위에 몸을 바짝 웅크린 자세로 자라고 있었다​​1​그날길을 걷다가 언뜻금박 입힌 손가락이 보였다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음흉스러운 음성으로가던 길을 묻는다어디로...
하태린
한여름날의 정원 2021.08.09 (월)
정재욱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지난 달 열 돔 현상으로 이곳 밴쿠버 날씨가 사상 최고로 45도 이상의 폭염을 기록했다. 에어컨이 있는 곳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늘이 있는 곳에서도 바람 한점 불지 않는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부터 더운 날씨에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 전화에 내 생애에 이런 더위는 처음이었고, 밴쿠버가 예년 날씨 같지 않다고 대답했다. 폭염과 비가 내리지 않는 날씨...
정재욱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71  72  73  74  75  76  77  78  79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