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를 만나러 시애틀에 갔다. 거의 일 년 만이다. 마중 나온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든다. 어색하게 끌어안으며 살가운 냄새를 맡는다. 새로 이사한 집을 둘러본다. 이 많은 짐을 혼자 싸고 풀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하다. 홀로 살아도 갖추어야 할 것은 한 가족이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직도 어린애 같이 느껴지는 딸아이가 또 다른 나라에서 직장 다니며, 잘 적응하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딸아이가 미국으로 직장을 옮기겠다고 했을 때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발 디딘 캐나다 땅에 달랑 네 식구, 외로운 섬처럼 서로 의지하며 뿌리내려왔다. 기둥 하나가 빠져나가는 듯 휘청거렸고, 휑한 공간은 시간이 흘러도 채워지지 않았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으리라 스스로 위안했지만, 한번 보러 가기가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오래전, 나의 부모님도 이런 심정이었으리라 생각하니, 아프게 묻혀 있던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서울에서 근무하던 학교를 그만두고 어릴 적부터 동경해오던 시골 체험을 위해 강원도 산골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강원도 횡성으로 전근 갔던 해 5월이었다. 5월 말의 시골 햇빛은 강렬했다. 거칠 것 없이 내리쬐던 태양은 오후 6시가 되도록 지칠 줄을 몰랐다. 며칠 남지 않은 체육대회를 위해 준비해 오던 매스게임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아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하얗게 피어오르던 운동장 먼지와의 씨름을 끝낸 뒤였다. 밀린 서류를 정리하느라 늦은 퇴근을 할 무렵, 한 학생이 다가와 “선생님 부모님 오셨어요.” 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뭐라고?” 하며 고개를 돌리니 엄마 아버지가 뒤에 우뚝 서 계셨다. 아버지의 한 손에는 그 당시 사정으로는 귀해서 먹어보지 못했던 바나나가 가득 포장된 바구니를 들었고, 또 다른 손으론 백화 수복 두 병이 든 커다란 박스를 들고 있었다. 팔에는 무릎이 안 좋아 잘 걷지 못하는 엄마의 팔이 걸쳐 있었다. 두 분 다 얼굴에 땀이 범벅이었다. 나는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반가움보다는 속상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앞장서라. 교장 선생님 먼저 뵈어야겠다.” 하며 숨 쉴 틈도 없이 몸을 돌렸다. 이미 퇴근한 교장 선생님 댁으로 안내하며 가슴 밑바닥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서울서부터 준비해 왔을 이 무거운 물건을 들고 그토록 먼 길을 왔을 생각에. 난 부모로부터 독립하기에 충분한 나이였고, 나름 능력도 인정받으며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터였다. 그리도 내가 못 미더웠나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과년한 딸자식을 객지에 홀로 보내 놓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교장 선생님 집을 방문하여 모자란 딸자식을 맡기니 잘 부탁드린다는 말과 인사를 전한 아버지는 바나나 바구니와 정종 박스와 함께 무거운 마음도 내려놓은 듯 보였다. 하숙집에 들른 아버지는 말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물 한 잔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통째로 건네준 바구니에서 바나나 한 송이라도 덜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침 이 집이 학부모 집이고 잘 돌봐 주신다는 말에 다소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방 구들을 유심히 살피시더니 연탄가스가 새는지 늘 신경 쓰라고 했다. 저녁 드시고 가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아쉬워하는 엄마를 재촉하여 일어났다. 지금 떠나야 늦더라도 서울 집에 가서 잘 수 있다며.
아버지는 칭찬에는 과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지만 잘못한 일에는 침묵하셨다. 그 침묵 속에는 어떤 꾸지람보다도 더 많은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은 물론 막내딸인 나조차도 아버지는 어렵기만 한 존재였다. 모두가 궁핍한 시절이었다. 온 나라가 가난으로 신음하던 때 유복자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채 마치기 전, 어머니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당신에게 다정한 아빠라는 단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빌 언덕도 없이 내던져진 거친 환경에서 오 남 일 녀의 대가족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켜야 했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불굴의 의지와 정신력으로 무장된 아버지의 존재는 위엄 그 자체였다. 그 꿋꿋했던 위엄이 그날따라 터무니없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구의 몸으로 횡성 땅을 밟은 아버지에게, 살가운 표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허수아비처럼 걸쳐진 양복 속으로, 바짝 마른 몸을 휘적거리며 걸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의 팔에 매달리듯 뒤뚝 뒤뚝 발자국을 옮기던 엄마를 허전한 눈빛으로 좇고 있었다.
딸아이의 체취가 묻어있는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이불 빨래를 한다. 시장에서 먹거리를 사고 아이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만들며 가슴이 설렌다. 밥만 있으면 간단히 먹을 수 있도록 밑반찬을 준비하며, 시간이 빨리도 흐름에 초조해진다. 엄마가 집에 있어 마음 든든하고 편안하다며 빨리 집에 오고 싶다는 딸아이의 말에 기쁘면서도, 나 떠난 빈자리를 다시 채워야 할 딸아이의 빈 공간이 시리다.
그 옛날,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리도 쓸쓸하게 보였던 이유는, 이제는 딸을 놓아도 되겠다는 안도감과 놓지 못할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모의 마음은 대지와 같으리라. 흙 속에서 씨앗이 움트고 자라며 나무가 되지만, 세상에 나가 추위와 더위, 비바람을 견디며 크고 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나무의 몫이다. 대지는 무엇을 해주려 애쓰거나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해 조바심내지 않는다. 단지 넉넉하게 뿌리를 품어주고 바라봐 줄 뿐이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온갖 우려와 기대는 유리병 속에 밀폐하여, 흐르는 세월에 띄우기로 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질 수 있다면, 내 모습 이대로 아이들 곁에 머물러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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