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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도 못켜던 디트로이트, 전기차 갈아타고 부활의 질주

디트로이트=윤주헌 특파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12-19 08:30

미국 제조업 부활 현장 르포

▲1988년 문을 닫았던 미시간중앙역은 미국 자동차 업체 포드가 2018년 사들여 리모델링을 진행 중이다. 포드는 내년 이곳을 자율주행차 연구소 등으로 탈바꿈해 공개한다. /윤주헌 특파원

미국 북부 미시간주(州) 디트로이트에 있는 옛 미시간 중앙역은 1988년 이후 35년 동안 문 닫은 채 방치돼 있었다. 최근 찾아간 이 역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공사가 한창이었다. 한때 도시의 쇠락을 상징했던 폐역(廢驛)을 자율주행 등 자동차 첨단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 시설로 바꿔 내년 초 문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미시간주에 본사를 둔 자동차 회사 포드가 9000만 달러(약 1173억원)를 주고 이 역을 사들여 리모델링을 진행하고 있다. 포드는 미시간주 교통부와 협력해, 인근 주민들에게 의약품·음식 등을 배달하기 위한 드론(무인기) 정거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도 지난 10월 발표했다. ‘실패한 미국’의 상징을 ‘첨단으로 되살아나는 미국’으로 바꿔 보여주겠다는 디트로이트시와 포드의 야심이 이 거대한 역에 담긴 듯했다.

미 3대 자동차 회사인 GM은 ‘팩토리 제로’로 불리는 전기차 전용 공장을 2021년에 22억달러(2조6000억원)를 들여 디트로이트에 만들었다. 지난 7월엔 ‘팩토리 제로’ 인근에 있는 2015년부터 사실상 버려져 있던 공장을 매입해 전기차 부품 생산·보관 시설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다. 이 작업이 내년 2분기 중 끝나면 35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전망이다.

그래픽=송윤혜
그래픽=송윤혜

20세기 미 제조업의 상징이었다가 저렴하고 연비 좋은 일본 차와 값싼 중국의 노동력 등에 밀려 낙후된 ‘러스트 벨트(rust belt, 녹슨 지대)’로 전락했던 디트로이트가 본격적으로 부활하고 있다. 전기차·자율주행차·배터리·드론 등 미 정부와 기업이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지목한 첨단 산업이 디트로이트에 두 번째 부흥기를 돌아오게 한 주인공이다.

디트로이트시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차를 타고 10여 분 달리면 왼편에 약 23만평(188에이커) 부지에 들어선 공장 단지가 펼쳐진다. 2m 높이의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에 부품을 실은 수십t짜리 트럭들이 종일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곳은 포드·GM과 함께 미국 3대 자동차 회사로 꼽히는 스텔란티스의 공장이다. 지프·크라이슬러의 모기업인 스텔란티스는 2021년 말에 16억달러(약 2조원)를 들여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GM의 ‘팩토리 제로’는 GM의 차세대 전기차 생산 거점이다. 스텔란티스 공장과 ‘팩토리 제로’ 부근에선 공장 확장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 중이었다.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 3대 자동차 업체가 몰려 있던 디트로이트는 20세기 미국 제조업의 상징적인 도시이자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유가가 오르자 연비가 좋고 잔고장이 나지 않는 일본차·독일차 등에 밀리며 암흑의 도시로 변해갔다. 1950년대 185만명에 달했던 인구는 70만명 밑으로 내려앉았다. 도시를 대표하는 기업 GM이 2009년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등 도시의 주력 산업인 제조업이 몰락했고, 2013년 7월 디트로이트시(市)도 180억달러(20조2600억원)의 빚을 떠안은 채 파산했다.

약 2조원을 들여 디트로이트에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자동차 생산 공장을 세웠다. 약 30년 만에 디트로이트에 만들어진 자동차 공장이다. 최근 찾은 이 공장에는 쉴새없이 대형트럭이 드나들었다.
/윤주헌 특파원
약 2조원을 들여 디트로이트에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자동차 생산 공장을 세웠다. 약 30년 만에 디트로이트에 만들어진 자동차 공장이다. 최근 찾은 이 공장에는 쉴새없이 대형트럭이 드나들었다. /윤주헌 특파원

파산 당시 디트로이트는 도심에 있는 가로등을 켤 여력조차 없었다. 한 주민은 “당시 신호등에서 차를 멈추면 강도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차를 천천히라도 계속 움직여야 했다”고 말했다. 파산 10주년을 맞은 디트로이트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디트로이트는 첨단 공장이 잇따라 들어서고 이를 기반으로 제조업이 부활하며 활기차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모습이었다. ‘러스트 벨트’의 우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환경 미화원들이 도시 구석구석을 청소해 거리는 깨끗했고, 저녁엔 번화가인 우드워드애비뉴를 따라 불 밝힌 식당이 손님으로 가득 찼다. 데이비드 와이트 디트로이트 경제개발공사 선임국장은 “디트로이트에 다시 일자리가 늘어나며 거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고 했다.

디트로이트시와 미 언론 등에 따르면 디트로이트시의 부활은 연방 정부의 전방위적인 제조업 부양책, 지방 정부의 적극적인 기업 혜택, 민간의 대규모 투자 등 ‘삼각 연대’가 이끌어낸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제조업 몰락에 위기감을 느낀 미 연방정부는 민주당·공화당 할 것 없이, 2010년 이후 세제 혜택과 보조금 등을 지원하며 해외로 나간 공장을 다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 정책을 펼쳤다. 조 바이든 정부가 코로나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첨단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과 세금 혜택을 주는 내용을 골자로 한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마련하고 지난해 도입한 것도 ‘신규 첨단 공장’을 미시간으로 많이 불러들였다. LG에너지솔루션이 올해 말부터 2025년까지 미시간 공장에 총 4조원을 투자해 도요타 전용 배터리 셀과 모듈 생산 라인을 구축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IRA 효과로 미시간에만 약 1만개 가까이 일자리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샌프란시스코 같이 이미 기업이 꽉꽉 들어찬 ‘잘나가는 도시’보다는 텅 빈 공장과 빈 땅이 많은 ‘한때 망했던 도시’가 새 공장을 세우기엔 더 유리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방 정부는 2010년대 들어 디트로이트에 투자하는 기업을 세금 감면, 양질의 노동력 공급 등으로 유혹하고 있다.

디트로이트를 살리려는 민간 기업·기업가의 노력도 힘을 보탰다. 디트로이트 출신 억만장자 댄 길버트는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 개발사 베드록을 통해 55억달러를 들여 100개 넘는 낡은 건물을 산 다음, 시내에 213m 높이의 초고층 빌딩을 포함한 복합단지 ‘허드슨 사이트’를 건설하고 있다. 거대한 크레인 여러 대가 쌓아 올리고 있는 이 건물의 공사 현장은 디트로이트 시내 어디에서도 보였다. 초고층 복합 단지가 내년에 예정대로 완공되면 ‘칙칙한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의 도시 풍경이 세련된 첨단 도시로 완전히 바뀔 것으로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최근 찾은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은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3년 파산했던 도시는 10년이 흐른 지금 재기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윤주헌 특파원
최근 찾은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은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3년 파산했던 도시는 10년이 흐른 지금 재기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윤주헌 특파원

미시간 중앙역 바로 옆에 있는 3층짜리 거대한 옛 우체국 건물은 민관이 합심해 첨단 도시로 변신 중인 디트로이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의 쇠락과 함께 문을 닫았던 이 건물을 사들인 포드는 이를 스타트업 입주 공간으로 바꾸어 지난 4월 새로 문을 열었다. 내부에 거대한 아트리움(안마당)이 펼쳐진 이 건물엔 활기찬 젊은 스타트업 직원들이 계속 들고 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 공간에 입주한 기업 중 절반 정도는 다른 도시에서 왔다고 한다. 디트로이트시는 기존 기업과 손잡고 신규·확장 중인 스타트업에 분기마다 총 50만달러를 지원하는 ‘모터 시티 매치’ 보조금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의 스타트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연방·지방정부와 민간의 ‘삼각연대’ 효과는 숫자로 드러나고 있다. 2013년 4만8708달러였던 디트로이트시 지역의 1인당 GRDP(지역내총생산)는 지난해 5만4180달러로 높아졌다. 지난 4월 디트로이트의 실업률은 4.2%로 1990년 이후 3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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