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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허탕” 일용직 근로자 오늘도 새벽 칼바람에 운다

서보범 기자 신수지 기자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12-23 10:21

올해 아파트 착공, 작년 반토막 … 불황 한파에 인력시장 ‘빙하기’
지난 18일 오전 5시 30분쯤 인력사무소가 밀집한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앞의 모습. 강추위에도 건설 현장 일감을 구하려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인도를 가득 메웠다./박상훈 기자
지난 18일 오전 5시 30분쯤 인력사무소가 밀집한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앞의 모습. 강추위에도 건설 현장 일감을 구하려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인도를 가득 메웠다./박상훈 기자

지난 19일 새벽 5시 서울 구로구 남구로역 삼거리 인력시장. 체감 온도 영하 11도 추위에도 인력시장 인근 길거리는 일감을 찾아 나온 근로자 400여 명으로 붐볐다. 장갑과 마스크, 귀마개로 중무장한 이들은 거리에 서서 한두 시간씩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렸다. 폐기름통 속 모닥불로 언 몸을 녹이던 최모(61)씨는 “추운 것보다 일감이 없는 게 더 무섭지”라고 했다.

세밑 한파에도 일감을 찾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건설 시장 불황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인력 사무소 60~70곳이 밀집한 남구로역 새벽 인력시장에는 이날 일용직 근로자가 2000여 명 몰렸다. 한 인력 사무소 관계자는 “건설 업계 불황으로 소규모 현장 공사가 중단된 탓에 강추위에도 2~3주 전과 비교해 이곳을 찾는 구직자가 약 20% 늘어났다”며 “서울에서 이곳 인력시장 규모가 가장 커 그나마 일감을 찾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일감을 찾은 근로자들은 보통 오전 7시부터 일과를 시작해 하루 평균 9~10시간을 일한다. 일당은 13만~18만원 수준이다.

이날 인력시장을 찾은 600여 명은 일감을 찾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새벽 6시 20분쯤 근로자 모집이 마무리되자 일거리를 찾지 못한 근로자들은 “오늘도 허탕이네”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건설 시장이 얼어붙은 건 높은 금리와 치솟은 자재비 때문에 건설사들이 공사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다. 올해 1~3분기 착공에 나선 건축물은 11만4743동(棟)으로 작년 동기보다 25.7% 줄었다. 특히 인력 수요가 많은 아파트 등 주택 착공 물량은 올해 들어 10월까지 14만1595가구로 전년 동기(33만997가구)보다 57.2% 급감했다.

주말이었던 지난 17일도 체감 기온 영하 18도였지만 200여 명이 인력시장을 찾았다. 새벽 5시 30분쯤 근로자 40~50여 명이 사무소 인근 거리에 모여 있었다. 몇몇은 제자리에서 뛰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추위를 견뎠다. 서울 구로구에 사는 목수 김철학(47)씨는 “일감을 찾을 때까지 6시간씩 기다리는 경우도 허다하다”며 “매일같이 나와도 일하는 날은 2~3일에 한 번꼴”이라고 했다. 김씨는 “특히 일요일은 허탕 칠 확률이 높은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으니 나올 수밖에 없다”고 했다.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보인 18일 오전 5시 30분께 남구로역 3번 출구 맞은편 인도에 건설 현장 일감을 구하려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가득 몰려 있다./박상훈 기자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보인 18일 오전 5시 30분께 남구로역 3번 출구 맞은편 인도에 건설 현장 일감을 구하려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가득 몰려 있다./박상훈 기자

일용직 근로자들에게 올해 12월은 한파까지 이어져 더욱 혹독한 시기라고 한다. 강인석(56)씨는 “이제 가장 힘든 시기에 들어선 것”이라며 “한 달에 열흘을 일하면 다행인 상황”이라고 했다. 서울 구로구에 사는 임춘식(58)씨는 “새벽 4시부터 두 시간째 일감을 기다리고 있는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찾기가 쉽지 않다”며 “난방비라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새벽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임씨는 “날이 좋을 때는 노조 파업이 잦아 일을 못 하고, 겨울엔 일감이 없다”며 “어떤 현장이든 찾아만 주면 무조건 간다”고 했다.

인건비가 싼 외국인 근로자와 젊은 근로자를 선호하는 업계 분위기가 더해져 수십년간 일용직에 종사해 온 이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40년째 일용직에 종사 중이라는 김학수(67)씨는 “중국인들이 몰리면서 이제 나이 든 한국인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며 “일요일부터 사흘째 허탕쳤다. 여기 남아 있는 수백명은 하염없이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11년째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다는 이모(64)씨는 “나이가 들수록 선호하지 않아 우리 나이대는 최대한 자주, 일찍 나와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매일 인력시장을 찾아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오늘처럼 허탕을 친다”고 했다.

내년도 건설 업계 상황은 올해보다 더욱 나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작년 229조7000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한 건설 수주는 올해 전년 대비 17.3% 줄었고, 내년에는 여기서 또 1.5% 감소한 187조3000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시장 불황 여파로 인한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 우려로 건설사의 자금 조달까지 어려워지면 실제 건설현장은 이런 예측보다 더 악화할 가능성도 있다. 부동산 PF는 건설에 필요한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 조달하는 자금이다. 이 PF시장이 얼어붙으면서 건설사들의 자금 확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인허가를 받아놓고도 착공을 미루는 곳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결국 일용직 근로자들이 일할 수 있는 공사현장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박철한 연구위원은 “높은 금리와 비싼 자재비 등으로 건설사가 투자할 여력이 많이 줄어든 상태”라며 “공사 물량이 줄어들면서 내년 일용직 근로자들의 상황은 지금보다 힘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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