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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덴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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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1-29 09:24

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나는 겨울이면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녔다. 어머니는 내가 키가 크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며 자주 나무라셨다. 그게 마음에 걸렸던 지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골덴 바지를 한 벌 사오셨다.

  바지에 대한 촉감은 허벅지까지 먼저 알아차린다. 병아리 털에 닿은 듯 부드럽고 포근하면서 약간 간지럽기도 했다. 그런데 길이가 길고 품이 컸다. 내 허리춤을 잡아보며 어머니도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년에는 딱 맞을 거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바지 밑 단을 두 번 접어 입는 걸로 바지 길이는 일단 해결되었다. 그러나 허리 품이 커서인지 내 몸이 더욱 빈약해 보였고 마치 어기적대며 걷는 듯 했다. 바로 걸으려고 다리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골덴 바지를 입은 날 저녁이면 허벅지가 뻐근했다.
  
  굵은 골이 곧게 나 있던 골덴 바지는 가지런히 일궈 놓은 밭 이랑 처럼 보였다. 우리 집에 없는 밭뙈기 대신 그 골덴 바지 이랑에라도 어떤 씨앗을 뿌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내게 사주신 골덴 바지는 보통 바지가 아니었다. 부잣집 딸인 영숙이의 바지와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내 주위에 머리 좋은 아이는 많았지만 나만큼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몸도 그때 일을 기억하는 지 지금도 골덴 바지를 입고 있으면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골덴 기지로 만든 옷은 다른 재질의 옷에게 다정하다. 골덴 자켓 아래 긴 모직 치마를 입어도, 골덴 바지 위에 가죽 자켓을 걸쳐도 자연스럽다. 처음 보는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잘 나누는 스타일의 사람에 댈 수 있겠다.
또 골덴 옷은 나이도 성별도 가리지 않는다. 조금 색이 바랜 브라운 계열의 골덴 자켓에 카키색 면 바지를 받쳐 입은 초로의 신사가 영화관에 혼자 들어서는데 내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상영 시작 벨이 울리고 어두워질 때까지 나는 그분의 모습을 몇 변 더 훔쳐보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어우러진 그 골덴 자켓은 그에게 원숙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골덴과 직조 방식이 비슷한 옷감으로 벨벳이 있다. 짧고 부드러운 털로 되어있는 이 옷감에는 비둘기의 목덜미 같은 관택이 흐른다. 그래서 벨벳 옷이 주는 분위기는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어떤 여자를 만날 때 나는 그녀가 ‘골덴 바지형’인지 ‘벨벳 원피스형’인지 가늠해 보곤 한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벨벳 원피스 형을 만나면 나는 주눅이 들어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지 못한다. 그녀가 내게 곁을 내어주지 않을까 봐 다가가기도 조심스럽다. 그녀와 몇 시간 보내고 돌아오면 멀쩡하던 어깨가 결리고 뒷 목이 뻐근하다. 그와 비해 골덴 바지형은 허세나 거들먹거림이 없다. 내가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도, 생각 없이 불쑥 내뱉는 말도 잘 받아주고, 어쩌다 말 실수를 하더라도 그냥 웃어 넘겨준다. 그러니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저절로 무장 해제 된다. 나는 어떤 형에 가까울까. 편해 보이는 사람이 좋다 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고 싶은 이 심리는 뭘까.

  벽에 걸린 골덴 바지를 본다. 어느새 색이 많이 바래고 군데군데 골도 닳아 있고 무릎 부분은 둥그스름하게 튀어나왔다. 주인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느라고 제가 늘어나고 해지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제 주인의 무릎이 얼마나 많이 구부러지고 펴졌던가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바지는 스스로 주름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얀 벽에 걸린 낡은 골덴 바지를 보며 한 세상 잘 살다 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저 골덴 바지처럼 닳아지고 해지면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가는 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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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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