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눈 오는 날의 풍경

윤의정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4-02-05 11:53

윤의정 / 캐나다 한국문협
   어린 시절 나는 눈을 참 좋아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동생과 뛰쳐나가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코끝과 손끝이 발개져서 집에 들어오면 갑작스레 따뜻해진 공기에 손발이 가려워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 대곤 했다. 그래도 동네 친구들과 함께 눈을 굴려 가며 누가 더 큰 눈사람을 만들지를 겨루는 시간은 더없이 즐겁기만 했던 기억이다.

  그 시절 눈이 오면 부모님이 “눈이 오네. 길 얼지 걱정이야.” 하던 푸념을 하시곤 했는데, 어린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그림처럼 뒤덮인 모습을 보는 것이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 아닌가, 친구들과 하루 종일 눈 밭에서 뛰어놀 수 있는 행복한 날이 아닌가 하는 어린아이의 해맑은 생각으론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나 또한 눈 오는 날은 나에게 있어 출근길을 걱정하고, 미끄러져 다칠까를 걱정하는 날로 변해갔다.

  캐나다 밴쿠버 행을 선택하며 처음 이곳의 환경과 문화를 조사했었다.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온화한 기후를 지녔다는 대표적인 설명을 보고, ‘눈이 오지 않는 곳이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왔다. 그래서 한국에서 입던 두꺼운 겨울옷도 많이 가져오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안일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는데 너무 쉽게 결정을 내리고 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움직였으니 말이다.

  다행히 처음 맞이한 겨울은 예상했던 것처럼 춥지도 않았고 비가 많이 온다는 인상을 주었다. 분명 첫해는 그러했다. 그렇지만 그다음 해, 또 그다음 해로 갈수록 자주 오지는 않지만, 한 번씩 종아리를 덮을 만큼 많은 눈이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눈이 쌓이던 경험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눈싸움하던 시기 이외에 자주 접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롭기도 하고, 가늠할 수 없는 눈의 양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터라 가만히 내리는 눈을 감상하며 집 앞에서 유리 창문으로 하얗게 물든 세상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옆집, 앞집, 그 이외의 주변 이웃들이 하나 둘 삽을 들고 나오는 광경을 보았다. 모두 자기 집 앞의 보행자 길, 차가 주차 되어 있는 입구에 있는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보행자 길에 도보가 보이기 시작했고, 치운 눈을 옆으로 쌓아 삐죽 솟은 눈 더미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나는 삽을 준비하지 않아, 유심히 지켜보기만 하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그러자 캐나다에서 눈이 오면 집 앞을 반드시 치워야 한다는 말과 함께 어디서 삽을 구하는지 등에 관한 팁도 들을 수 있었다.

  눈이 너무 많아 당장 삽을 사러 갈 수도 없어, 염치 불구하고 옆집에 물어봐 삽을 잠깐 빌렸다. 난생 처음 눈을 치우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한없이 가볍기만 했던 눈이 쌓여 돌덩이처럼 무거운 것이 되었고, 누군가 밟아 눌린 눈은 단단해 삽으로 잘 들리지도 않았다. 치워도 치워도 눈은 계속 쌓였고, 치우면서도 왜 눈을 치워야 하는 건지, 눈을 치우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지 회의감도 느꼈다. 어리숙하고 잘 몰라서,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툰 눈 치우기는 꽤 긴 시간 힘들기만 한 일이었다.

  매해 눈은 한 두 번씩 크게 내리곤 했는데 낯설기만 했던 눈 치우기는 점점 익숙한 연례 행사 같은 일이 되고, 눈을 치우며 옆집, 앞집과 소소히 소통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가끔 품앗이 하듯 서로의 집 앞을 대신 치워주는 일도 늘어갔는데, 그 사이 아이들도 자랐다. 그렇게 혼자 하던 눈 치우기가 함께 하는 일이 되면서 더 이상 힘든 일이 아니게 되었다. 또 꼬맹이었던 아이들이 나보다 더 키가 커지고, 힘이 세지며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눈이 오면 삽을 들고 나가 서로 눈을 치우는 건 밴쿠버 겨울 눈 오는 날 하나의 풍경으로 자리 잡아 갔다.

  이번 겨울도 눈이 퍼붓듯 온 날이 있었다. 눈을 치워야지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려는 데, 집 앞길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옆집까지 깨끗하게 치워진 길을 보고, 누가 치웠나 생각하며 삽을 찾다가 눈이 잔뜩 묻은 삽 두 자루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면 의례 더 일찍 일어나 치워주던 옆집에 고마움을 느끼곤 했는데, 올해는 아이들이 먼저 나가 대신 치워준 것이었다. 기뻤다. 별거 아닌 일인데, 서로 볏섬을 가져다주던 동화 속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라는 동화가 생각났다. 내 고향이 아닌 캐나다지만, 정이 있어 삶이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또 그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도 같은 마음을 익히는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졌다. 캐나다 밴쿠버의 눈 오는 날은 나에게 따뜻하고 안온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날이 되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부서지는 소리 2022.08.29 (월)
여름밤은 너무 짧았어요토막 난 꿈처럼요 불기 없는 아궁이,반짝이는 별 몇 개 모아가당찮게도 불쏘시개인 양 쌓아 올렸지요매서운 연기에 캑캑, 찔끔가슴만 아렸을 뿐,밤의 고요는 채 안아보기도 전에 저만치 등을 보이고 말았지요        눈가를 적시는 짠 내 함께 그래도 바다에 서면 여백처럼 비껴가는 밤 파도 소리그래요부서지는 은빛 그대 목소리 아름다운 여름밤이었어요비록 동강 난 꿈은 구천을 맴돌지라도
백철현
(상)  밴쿠버에서 4시간 여 코퀴할라 하이웨이( Coquihalla Highway )를 달리면 독특한 사막 지형인 캠룹스( Kamloops )에 도착한다.그 소도시의 Jamieson Creek turnoff (Jameson Creek Forest Service Road)에서 시작되는 흙 먼지가 안개처럼 앞을 뒤덮는 비 포장도로로 한 시간 여 가면 차를 주차할 수 있는 넓다란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 주차한 후, 백 팩을 짊어지고 트레일 코스로 20여 분 내려가서 호수의 언저리 가운데서 배를 타고 또다시 20 여 분 노를 저어야 도착하는 곳...
김혜진
밴쿠버 망향가 2022.08.29 (월)
그리운 이 있어 고개 들어 바라 보니 하늘엔 뭉개 구름만날고 싶어 종이 비행기 접어 날리던 어린 날처럼서쪽 하늘 바라 보니 떠오르는 얼굴바람 부는 밴쿠버 공항 활주로엔 그리움만 깃발처럼 나부끼고말 못하고 떠나 버린 날처럼 지도 속엔 조국만 봐도 목 메이듯 가슴이 메여
전재민
침묵의 미학 2022.08.16 (화)
말을 잘해 타인을 설득하고 그것을 비즈니스의 성공요소로 발전시키거나 관계를 더 좋게 만드는 기술 또는 처세술에 대한 책이나 강연 등은 수없이 많다. 근자, 말을 잘해 나를 돋보이게 하고 경쟁에서 앞서게 해 준다는 전문 학원들이 성행하는 중이다. 그러나 말하기를 절제하므로 얻게 되는 소양의 함양이나 품격의 차별화를 가르치는 책이나 강연은 그다지 많지 않다. 정말 말을 잘하고 폼 나게 나를 대변하는 말솜씨가 관계나 비즈니스에서...
자명
스물 다섯 새내기 교사 시절고운 미소로 맞는 마흔 살 선배를 보며저 나이에도 여성일까 의아로워마흔 되기 전 사라져  늘 푸른 모습으로 기억되리라 결심했었다그 선배가여든 셋의 훈장을 달고 불볕더위 섶을 진 채밴쿠버에 왔다뻔뻔하게 세상에 남아 여성인 양 매일 단장하는예순 일곱 후배를 보러 선배와 밤샘 나누다 문득 풀려버린 추억의 매듭,꽁꽁 동여매둔 세월의 두루마리 속에서온갖 상(象)과 감상(感傷)들이 튀어나와 춤을...
김해영
  며칠 전 한국의 친지가 보내준 유튜브 기사 두 개가 아주 흥미로웠다. 첫 번째 기사 내용인 즉 요즘 한국에는 “ 쇼 닥터 “ 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속지 말라는 내용이었다.그들은 현직 의사들로 유명 방송국 교양 프로인 건강 상담 코너에 출연해 은근히 자신의 병원을 홍보하거나 특정 건강식품을 어디 어디에 특효라고 홍보한 후 그날 저녁 홈쇼핑 프로에 그 건강식품을 론칭해 대박을 터트린다고 했다. 이건 방송사, 식품회사 그리고 쇼 닥터 등...
정관일
참 잘했어요 2022.08.16 (화)
하루에 책 한 권을 읽고독서 통장에 기록하기차곡차곡 쌓여지는노랑 파랑 은빛 별들의재잘거리다속삭이는 소리 들어보기어린이 도서관에서손자랑 책을 나르며수박 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구름을 따다가 구름 빵도 만들어 보기오랫동안 만나지 못한다 해도언젠가 우리는 꼭 다시만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을파도 소리처럼 믿으며 살아가기그렇게 오늘도오십 계단을 오르내리며작은 집 이야기 나라로 들어가달콤하게 유치원 숙제 하기
김희숙
삶 그리고 일기 2022.08.08 (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바른 글씨체로 책 속의 글을 베껴 쓰는 것을 좋아했었다.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내용을 발췌해 정자체의 글씨로 문장을 따라 쓰는 것을 연습하곤 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가 문학 대전집을 당시 월부로 구매해서 선물로 사 주셨는데, 이 전집에서 처음 골라 읽게 된 책이 그 유명한 '처칠 회고록' 이었다. 처칠 회고록을 시작으로 한 권 한 권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재미있어서 24권의 대전집을 모두 섭렵하게 되었다...
정효봉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