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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문학 신춘문예 당선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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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3-27 16:22

장려 | <홍안에서 노안으로> 이형만
장려 |<해부 아(我)> 김보배아이
장려 | <밤의 캔버스 아래> 줄리아헤븐김
<홍안에서 노안으로>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에 비해 어려 보여 난처했던 적도 꽤 있었고, 나이 들어서는 비교적 젊게 보니 마음이 흡족할 때도 있었다.
20대 초반 제대 후 복학을 했을 때의 일이다. 경기도 안양시 어느 변두리를 걷고 있었는데, 불량하게 보이는 학생 세 명이 나에게 다가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한 명은 체격이 작았지만 뒤에 2명은 보통 체격 이상으로 컸다. 나는 제대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머리가 짧았고 군기가 남아 있어 체격이 남달랐는데, 그런 나를 어리게만 보고 덤빈 것이다. 순간 싸울지, 도망갈지, 돈을 주고 보낼지를 머릿 속으로 궁리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이 고등학생들이랑 싸운다면 자존심이 상할 테고, 도망가는 건 군의 명예 실추였다. 그렇다고 돈을 주기는 더 싫었다. 그런데 관성의 법칙인가. 판단에 앞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당시 논산훈련소에선 9타를 안 하고 8타를 한다고들 했다. 교관이나 조교가 때릴 때 연속해서 여덟 번 때리고 아홉 번째 때리기 전 ‘나 너 구타 안 했다.’라고 확인할 정도로 때렸다. 하도 많이 맞으니 그게 몸에 배게 되어 고참이 되면 그 이상 때리게 된다. 그런데 육체적 폭력 못지않게 심했던 것은 언어폭력이었다. 이때 쓰는 욕은 국어 대사전에는 전혀 안 나오는 절대하면 안 되는 욕만 골라서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불량 학생들에게 욕부터 퍼부었다. 요지는 나이도 어린 것들이 군대 갔다 온 어른한테 무슨 짓 하는 거냐는 뜻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지구상 최악의 욕이었다. 그리고 몸을 풀면서 덤비라고 했다. 그러자 앞에 있던 작은 체격의 학생이 ‘죄송합니다’하며 고개를 90도로 숙였고, 뒤에 섰던 아이들도 뒤로 피했다. 군대에서 배운 욕으로 그 상황을 모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30대 중반, 이스라엘에 단기 주재원으로 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레바논 히즈빌라와 전쟁 중이던 이스라엘에서 한국인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우연히 텔아비브 근교 도시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는 날 보더니 대뜸 ‘결혼 안 하셨죠.’ 하며 말을 걸어왔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라는 부부를 보며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이스라엘에서 임무를 마치고 본사로 복귀했을 때, 인사팀 여직원이 나를 보더니 ‘대리죠.’ 하고 물었다. 과장이라고 대답하니 긴장하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일도 있다. 당시엔 과장만 돼도 예우를 받던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살아오면서 나이보다 어리게 보이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고 어느덧 그 현상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은밀한 즐거움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대 후반, 병원을 갔는데 간호사가 날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충격이었다. 그보다 더 큰 충격은 마트에서 장을 보는 데 한 여성이 “어르신” “어르신”하고 부르며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고른 물건을 어디서 찾았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내가 더는 젊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젊어 보인다는 허상의 말에 취해 늙어가는 나 자신을 인지하지 못했음을 자각했다. 나이와 신분을 밝혀야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경전철에서도 자리를 양보받는 경로 대상자가 되었다.
“사람이 젊어 보일 수는 있어도 젊어질 수는 없다.”는 고 김동길 교수의 글이 떠오른다. 젊을 때 책을 많이 읽어 마음의 양식을 쌓아두라는 내용 중의 한 문장이었다. 지금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정신만은 늘 공부하여 젊게 유지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이젠 나이 보다 적게 보든 많게 보든 무감각해진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젊음만은 붙들고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책을 가까이하고 글도 쓰며 내 정서를 키워야 할 것이다. 감정적으로 메마르면 곧 늙어버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누군가가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면 ‘고맙지만 나는 아직 젊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해부 아(我)>

잠들지 않는 방
고개를 넘는 밤 
한 평 열공의 연구실 
밤마다 예술을 들이키고 십중팔구 취해있다 
모세혈관 타고 발정하는 무한대의 공상들 
치기 어리석은 문장 사열시킨다 
늘 한가지씩 까먹고 
나사빠져 삐걱대는 서랍장 뒤지며 수선 떤다 
언젠가는 입겠지 
정리못한 구겨진 자존심들이
그런대로 개켜져 있다 
형광등 깜박이고 두 동공도 따가워 
별 수 없이 등허리 내려 놓는다 
불안의 응어리를 베고 누운 탓에 
뒷 목 통증 새벽까지 그르렁거린다


<밤의 캔버스 아래>

부드러운 윤기 검은 벨벳 망토가 펼쳐지면
아직도 채우지 못한 그림을 그린다. 
노란 달빛에 의지하여 그려나간 
점 하나마다 숨겨있는 사연
별들이 자유롭게 춤추는 그곳 
그곳엔 달빛만이 비밀을 감추어 주고 
못다한 이야긴 밝은 여명에 스러져 간다.
짙은 밤색 머릿결에 사이사이 
회색 날실이 끼어들고 
언제부턴가 밤바람이 뱉어내는 한숨에 시선이 머무는 그곳 
그곳엔 아직도 내 이야기가 있다. 
첫사랑의 허상이 깨어지고 
돌아서던 그 날 그밤에 
상처입은 영혼을 달래는 따뜻한 숨결 
부드럽게 감도는 바람의 향기는 
내게 다가오는 또 하나의 사랑 
남 몰래 눈물 훔치던 그 뺨에 담기는 참사랑의 흔적은
밤하늘에 새겨지는 또 하나의 이야기 
달빛 실은 밤바람은 춤을 추고 
우주를 향한 시간의 엇갈림은 
주름 잡힌 골 사이로 별이 흘러내린다.
밤하늘에 쓰여진 무수한 이야기 
밤의 쓰개치마 덧대어 펼쳐 놓으니
어느새 63개 
시간에 갈린 별들이 빛을 찾아갈 때
63년의 여정, 밤의 벨벳 아래에서 못다한 그림을 그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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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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