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희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누군가 졸거나 술을 한잔한 것이 죄가 될 수 있을까? 정답은 없다. 세상이 이미 복잡계의 시대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나만의 의견과 해답이 있다면 맥락과 상황에 따라 여러 해석이 나올 것이다. 요즘 말로 “그때그때 달라요.“ 하면 무난한 대답이 될까? 그러나 그런 행동을 금지해야 할 하나의 해석이 있다면 졸거나 술을 마신 경우이다. 나의 작은 잘못된 습관. 과거의 생각 없는 익숙함. 부주의. 이런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살인이라는 결과를 부른다면 이는 생각해 봐야 한다. 같은 행동이라도 말하는 사람의 위치와 처지에 따라 책임이 다르다. 같은 말 같은 행동이라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속도를 더하며 날로 복잡함을 더해가는 현대에 폐품처럼 쌓이는 지식과 가짜뉴스는 매일매일 여기저기서 열매 맺고 터진다. 이러한 혼란과 정보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수영하는 방법을 연습한다. 관계의 바다에서 언어로 수영하는 법. 이것을 처세술이라 한다. 이 수영이 서투를 때 관계에서 물을 먹고 코로 물이 들이닥치고 그러다 운 좋게 구조되기도 한다. 그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느낌. 물이 코로 들어와 괴롭고 숨이 막히며 나란 존재가 점점 꺼져가는 느낌. 이 느낌이 관계에서 느끼는 외로움이요 무시의 느낌이다.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동물. 호모사피엔스는 관계에서 무시 받을 때 존재의 죽음을 느낀다. 누군가 말은 상냥하지만 몸짓이 말의 느낌과 일치하지 않고 말이 자주 끊어지며 공백이 될 때 어색함을 느낀다. 이 감정을 자주 느끼면 존재는 무의식적으로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대부분이 컴퓨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SNS를 하는 요즘은 싫어도 글을 쓰고 읽어야 하니 문맹이란 어려움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맹이라는 글자를 상상력을 발휘해 컴맹. 관계 맹. 소통 맹 등으로 단어를 확장해 보면 타인들에게 익숙한 행위가 나에게는 장벽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대부분 글자를 몰라 글을 읽고 쓰며 전달하는 행위가 귀족이나 기득권의 특권으로 느껴지던 시대에 언어의 혜택을 대중으로 확산시킨 때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대중교육을 시작하던 때가 최초이다. 따져보면 인류역사에서 대충 200년 전의 일이니 서민이 글을 학습하던 때는 인간의 진화역사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매우 최근의 사건이다. 그러니 대화에서 상황을 언어의 내용으로 이해하기보다 분위기 냄새 느낌 등의 비언어적인 단서로 상황을 판단하고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은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말의 내용보다 목소리와 소리의 크기 억양. 말하는 사람의 표정에 더 영향을 받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같은 말이라도 강도가 쓰면 사람을 해칠 수 있지만 의사가 쓰면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이런 당연한 언어의 속성에서 무엇을 유추할 수 있는가? 복잡한 상황에서 문제해결이나 섬세한 배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언어의 정교함과 그 기량이 많이 필요하다. 호모 사피엔스만이 만든 유연한 소통방식인 언어활동은 복잡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의견이 다른 많은 대중을 하나의 목표에 일치시켜 힘을 모을 수 있다. 언어로 질서를 만들고 약속을 하고 법과 규칙을 만들어 현실 공동체를 통제하고 조율하며 공동체 미래의 존속을 기약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언어로 합의를 이루고 공동체를 조율하는 정치방식이다. 이러한 언어가 현실의 복잡함을 소화하지 못해 소통의 섬세함을 포기할 때 현실을 통제하여 질서를 만들기 위해서 힘과 완력이란 손쉬운 방식에 의지하게 된다. 과정의 지루함보다 결과의 명확함이란 효율성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내 언어의 그릇이 현실의 복잡함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성취하려는 의지가 상대 마음을 관통하지 못할 때 나도 모르게 점점 뱉아내는 말에 힘이 들어간다.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며 리듬을 잃게 된다. 하는 말에 거친 감정의 힘이 실리고 얼굴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몸에 다른 근육을 쓰게되는 이유는 나도 모르게 힘으로 나의 질서를 만들려는 욕망의 자연스런 표현이다. 하여 언어가 문제해결에 서투르면 나도 모르게 힘의 유혹에 굴복하고 이러한 순간이 자주 반복되면 나의 언어습관이 된다. 언어의 폭력이 문제해결의 익숙한 수단이 된다.
이제 고통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일상 아래에 은폐되어 있다. 일상의 아름다움과 편리함을 위해 우리의 편안한 심기를 보호하기 위해 고통들은 매끈하게 포장되어 약자들과 함께 일상에서 숨어 있다. 유려한 편리함의 가면 안에 눈물짓는 얼굴들이 있다. 나의 편리함. 유용함이 누군가의 고통의 댓가라는 상상력이 일상에 감사라는 마음을 깨운다.
감사라는 표현이 언어의 피부라면 사랑은 그 언어의 속살이다. 그래서 감사는 언어의 용기이고 능력이다. 그 능력의 뿌리는 타인에게 뻣쳐 있는 관심과 궁금함이다. 나를 넘어서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 보는 마음. 말과 행동을 남을 배려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랑의 마음. 배려이다. 나의 위치를 잘 가늠해보고 지금 일어나는 일. 덕분에 무던하게 넘어가는 일상에 감사를 한다. 배려의 힘이 나를 벗어나는 능력이다.
한국에 있는 친구가 슬픈 카톡을 보내왔다. 조카가 아침 출근길 운전에 졸음 운전하는 트럭과 충돌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단 1명의 청년이라도 귀한 세상. 미혼의 43살 젊은이가 출근길에 삶을 달리했다. 그 트럭 운전사는 피곤하고 그래서 운전이 힘들면 운전을 좀 쉬지 못했을까? 친구 조카의 명복을 빌며 부모님들의 마음 평안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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