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일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어릴 적 할머니는 약주를 드실 때면 늘 한 소절의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 나구요, 이내 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이 노래는 할머니의 깊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그 누구도 할머니의 아픈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조용하셨지만, 할머니의 가슴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할머니는 열 한 명의 자녀를 낳으셨고, 그 중 두 명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남은 아홉 남매를 키우며 고된 삶을 견뎌내셨다. 농사일과 가사 일을 하면서, 또 한 명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할머니에겐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그래서 막내를 임신했을 때는 유산시키려는 마음에 스스로 배를 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듯이, 생명 역시 할머니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아홉 남매를 키우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셨다.
할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분이셨다. 새벽부터 막걸리로 하루를 시작하시며, 늘 혈액 속에 알코올기를 지니고 계셨다. 화가 나면 큰 소리로 야단을 치셨고, 할머니와 식구들은 할아버지의 화를 피하려 조심스럽게 생활했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곁에서 늘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살아가셨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할머니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한은 할아버지의 성격이 아니라, 훨씬 더 큰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할머니가 55세 되던 해, 큰아들이 어린 세 아이를 남기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은 할머니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셨지만, 그 슬픔은 할머니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할머니의 노래 속에 담긴 그리움과 슬픔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짙어져 갔다. 할머니는 그 아픔을 드러내지 않으셨지만, 나는 할머니의 가슴속에 자리한 그 깊은 슬픔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만 약주를 드셨던 할머니는, 약주를 드시면 절제를 못 하시고 계속해서 드셨다. 기분이 좋아지면 말씀도 많아지시고,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셨다. 그러다가 ‘석탄 백탄 타는데 …’하며 노래를 시작하셨고, 그 노랫말 속의 슬픔이 깊어질 때면,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기절하곤 하셨다. 수없이 많은 밤을, 할머니를 응급실로 모셔가며, 나는 할머니의 노랫말 속에 담긴 그 깊은 슬픔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박완서 작가는 막내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뒤, 그리움과 슬픔을 담아 그녀의 바람을 수필집에 남겼다. "천국에서 아들을 만나면 등 짝을 한 대 때려주며, 무엇이 그리 급해서 먼저 갔느냐고 묻고 싶다"라고 했다. 어머니로서의 애절한 그리움과 한없는 애정을 표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마치 연락도 없이 늦게 까지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아들을 만났을 때의 안도감과 함께, 애타는 마음으로 한 대 때렸던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했다.
흔히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호흡하는 매 순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리움, 슬픔과 아픔이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도 천국에서 아들을 만나 그토록 애 끓던 그리움을 담아 등 짝을 한 대 때리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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