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광고문의
연락처: 604-877-1178

다크 서클

정성화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4-12-16 09:15

정성화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며칠 전부터 형광등을 켤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스위치를 올리면 한두 번 끔뻑거린
뒤에야 불이 들어왔다. 그러던 게 오늘은 아예 반응이 없다. 의자를 놓고 형광등을 떼어
보니 양쪽 끝이 거무스름하다. 백열등보다 느린 녀석이 제 긴 몸에 불을 당겨오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다크 서클’이 짙다.
  이젠 불을 끌어오지 못하지만, 일하는 내내 뜨거웠을 형광등의 몸체를 잠시라도 선선한
곳에 눕혀준다. 내가 형광등의 다크 서클을 예사로 봐 넘기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십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남편이 두어 달 걸리는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늘 그의 눈
밑부터 살폈다. 눈 밑이 맑고 깨끗할 때가 별로 없었다. 거무스름하거나 심할 때는
푸르죽죽하기까지 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되었냐고 하면 “이만하면 미남이지.”라고 그는
얼버무렸다. 콘테이너선이 태평양을 건너는 데는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배를 타고 있는 선원들은 일주일 만에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게 된다. 항해하는 동안
하루에 한 시간씩 시간을 전진시키거나 후진 시켜야 하니, 수면 시간과 식사 시간이 매일
바뀌어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배라는 것은 화물을 싣고 바다를 오갈 때만 운임이 산출되기에 바쁘게 움직인다. 아무리
기상 조건이 나빠도 정해진 날짜에 입항하고 출항해야 한다. 언젠가는 입항하자마자 ‘선박
검사’를 받는 바람에 두 달 만에 보는 남편을 부산역 앞의 아리랑호텔 커피 숍에서 겨우 한
시간 만나고 헤어진 적도 있다. 서로 얼굴 한 번 보고 시계 한 번 들여다보고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는 것은 그의 눈 밑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다크
서클뿐이었다.

  땅을 디디며 살게 되면서 그의 다크 서클도 차츰 옅어져 갔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에서
잠을 자고 제 때 집 밥을 먹은 덕택이려니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다크 서클이
있었다.
  그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배에는 없었던 마누라도 옆에 누워있겠다 그가 편히 못 잘
이유가 없는데도 그랬다. 자다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혹시 마누라 몰래 사채업자의 돈을 끌어다 쓰고 그들 로부터
갚으라는 협박을 받는 중이냐고 물었다. 아니면 우연히 지난날의 첫사랑을 만났는데
지지리도 고생하고 있어서 괴로워하는 중이냐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젠 수필
대신 소설을 쓰는 거요?”라고 했다.
  그는 잠이 들면 다시 선장 업무를 보게 되는데, 승선 중에 일어났던 사고들이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고 했다. 항해 중에 선원 한 사람이 사라져 배 곳곳을 수색하며 억장이
무너졌던 일, 갓 입사한 갑판부 선원이 선체에 도색작업을 같이 하던 중 선창에 떨어져 죽은
일, 배에 적재되어 있던 콘테이너 박스에서 불이 나 일박 이일 동안 불을 껐던 일 등. 모두
사람의 목숨이 달린 절체절명의 사고였다.
  꿈이란 자신의 심리적 체험이 상영되는 내적 공간이다. 그 무렵에 놀란 신경 조직이 아직
아물지 못한 데다, 그 흔적에 잠재의식의 빛이 들어가 당시 상황이 재현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배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스무 명 남짓한 선원들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그가 받은 고통과 자책감이 얼마나 컸을까.
  소리와 진동에 예민한 것도 여전하다. 그가 잠들었다 싶어서 살며시 선풍기를 끄면 바로
깬다. 배의 엔진이 멈춘 줄 알았다면서 발칵 화를 낸다. 그도 힘들겠지만 그를 지켜보는
우리 집 선풍기와 나도 힘들다. 자다가 그가 지르는 고함이 고통스런 기억을 상쇄시키기
위해 그의 몸이 터트리는 ‘에어백’이라고 생각하면 반갑게 들리려나.
  평생 순탄하고 평온하기만 한 삶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마음속에 한 두 개의 다크 서클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짙고 옅음의 차이가 있을 뿐. 어쩌면 ‘다크 서클’이란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 받는 ‘확인 도장’ 같은 게 아닐지.
 웬만해선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가 가끔 철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는 봐 주기로 했다. 그가 이전에 내 마음에 새겨 놓은 여러 개의 다크
서클들이 지금은 그를 지키는 ‘마패’가 되고 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시월의 바다 2026.02.09 (월)
친구여 시월의 바다를 보러 가요에메랄드 번지는 바닷물 따라흰 돗이 기울듯 서툰 배는먼 항로를 찾아가고끝없는 햇살에 수평선이 눈부실 때젊은 꿈이 아직 말 못 하고 서 있지만해변의 잔돌들은 세월을 견디고여물어 가요겨울의 바다는 차가웁게 모두를 멀리하겠지요파도 속 산호는 빛을 잃고고기 때는 검은 투망을 피해 몰려다니고남겨진 조개들이 모래밭을 찾아 긴 행렬을 짓고검푸른 바위는 바다를 움켜쥐려고 울부짓을 거에요고동 소리를 담은...
김석봉
아버지를 찾아서 2026.02.09 (월)
  내 얼굴에도 인생의 흔적을 품은 고랑이 패기 시작하고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리게 되었다. 너 같은 딸을 낳아보라 하시던 엄마의 울분도 어느덧 내 것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50살이 넘어서야 집어 들었던 책이 있는데, 제목이 [아버지를 찾아서]이다. 아버지 없이 어린시절을 살아온 나였다. 그랬던 내가 저자를 따라 아버지를 찾아 나선 여정에 동행하였다. 나의 아버지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일곱 살 때 우리 엄마와 아빠는...
김보배아이
말은 입체다 2026.02.09 (월)
  어느 환자를 두고,"암입니다. 6개월 생존율이 5%이고 현재로선 치료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 A와,"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현대 의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치료 약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저와 함께 버텨봅시다."라고 말하는 의사 B가 있을 때, 환자는 어느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을까.남편 중에도 A타입과 B타입이 있다. 아내가 저녁밥을 먹은 뒤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할 때,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많이 먹을 때...
정성화
     세 갈래 길     삼거리 이정표를 만나거든     세상살이의 이치여,     지나온 길 뒤 돌아 보게 하고     잠겨서 보이지 않는 길,     찾아야 할 희망을 가늠하며     마음 걸터 앉아 숨 고르는     쉼터 인 것을 알려 주구려.      삶이 한번이라도     등골이 휘는 세상살이를 일러     우연이라고 위로 해 주지 않듯   ...
조규남
“아빠, 뭐 보고 있어?”이른 아침, 아빠가 텃밭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풀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잠이 덜 깬 눈으로 쪼르르 달려가 아빠 등에 기대며 물었어요.“아고, 우리 호야 깼구나. 더 자지 않고?”“어? 텃밭 풀이 다 어디 갔어요?”내 키보다 훌쩍 자란 풀들이 감쪽같이 사라졌어요.“우와! 텃밭에 풀이 다 없어져 보기 좋아요. 어젯밤에 우렁각시가 다녀갔나 봐?”“우렁각시? 하하 맞네. 착한 우렁각시.”아빠가 호탕하게 웃으며...
이정순
바람 2026.01.30 (금)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만나서 마음속으로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 진다. 바람을 쐬러 산책길에 나선다. 머리카락, 피부에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가슴을 열고 하늘을 본다.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감촉을 느끼게 한다. 하루에 한 번씩 바깥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어야 생기가 날 듯하여, 오후가 되면 산책길에 나선다. ‘바람을 쐬는 일’은 무슨 일인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스스로 물어보기도 한다.운동장을 몇 바퀴 걸으면 마음속으로...
정목일
이민 삼십 년 2026.01.30 (금)
이민자 낯선 땅에 뿌리내리려 할 때마다사람들은 내게 보이지 않는 눈금을 들이민다고향이라는 눈금, 학교라는 치수그들은 나의 과거를 재는 것이 아니라자신들이 밟고 올라설 사다리의 높이를 가늠하는 중이다골목마다 교회 숲을 이루는 도시절 향기는 댓돌처럼 차고 문지방처럼 높다교회의 찬송은 매끄러운 비단처럼 반짝인다사람들은 나를 그 화려한 그물 속으로 초대한다거절의 벽을 허물고 들어가 앉은 식탁 위에서나는 비로소 이방인의 허기를...
전재민
산에는산길에는해 오르고 달 오르는 길이 새롭다 산은철따라 외로움이 피고 지는꽃들의 터전 그리움이 울어넘는산새들의 고향이다 미움도 사랑으로 옷을 갈아 입는아라리 산길 산에 오르면제 마음 봄이되어발걸음이 가볍다 산은오를수록 제 안의 저를 알아가게 하는무언의 스승 그 산길에 오르며 배움이 깊다
유병옥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