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또 새해가 밝았다. 을사년 뱀띠 해다. 어렸을 때는 왜 하필 12간지에 징그러운 뱀이
들어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세상에 뱀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자,
코끼리, 거북이, 봉황, 학 등 상서로운 다른 동물들도 많은데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뱀은 성경에서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을사년에서
'을'은 푸른색을 상징하며 동양의 오행에서는 생명력과 성장을 상징하는 나무를 뜻하기도
한다. ‘을’과 ‘사’, 이 둘이 합쳐진 푸른 뱀의 해 '을사년'은 새로운 시작, 지혜로운 변혁을
의미한다고 한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여러 가지 목표를 설정한다. 필자도
젊었을 때는 거창하고 웅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스케일이 작아져 요즘은
그저 그런 소박한 목표를 정하곤 한다. 그러나 이 소박한 목표마저도 작심삼일이 되고 말은
적이 많다. 작고하신 부친께서는 생전에 ‘너는 시작은 많이 하나 끝을 맺지 못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남들보다 학교를 일 년 일찍 들어가는 바람에 나는 또래들보다 덩치가 작았다. 중학교 때
몸집이 작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동네에 있는 태수도장에 등록을 했다. 태수도는
태권도와 공수도의 장점만 취합한 무술로 파괴력이 뛰어났다. 유단자인 검은띠를 따기
위해선 일 년 정도의 수련이 필요한데 청띠를 따고 반년 만에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글쓰기에 취미를 붙여 이런저런 문예지에 응모해 여러 번 상을 받았다. 어린 마음에
우쭐해져서 친구들에게 나중에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적도 있다, 그동안
써놓은 글이 꽤 되지만, 유명 작가는커녕 아직 책 한 권 내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바둑에
심취해 고수들의 기보를 연구하고 친구와 틈만 나면 바둑을 두었다. 바둑을 같이 두던
친구는 세월이 흘러 아마 3단의 경지에까지 올랐는데 나는 아직도 6, 7급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70년대 초반에는 벤처스 악단과 당시 국내인기 그룹사운드인 히식스와 키보이스의
영향을 받아 연주가의 꿈을 안고 기타 학원에 등록해 열심히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직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후 당구, 스키, 수영, 탁구, 테니스,
볼링, 골프 등을 돌아가며 배웠다. 그러나 이 모두가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도 미약하였다.
다만 한가지 위안이되는 것은 비록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시도는 해보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수양대군(세조)을 왕위에 올리고 영의정을 두 번이나 지낸 책사 한명회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생명이 위중해졌다. 세조의 아들인 성종은 그가 평생 나라에 공헌한
바가 크므로 승지를 보내어 그의 유언을 들어오게 하였다. 내심 그가 요구하는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생각이었다. 일반 사람 같으면 이 기회에 자기 자식의 입신양명 등
후사를 청원할 만도 한데 한명회는 내방한 승지를 통해 딱 네 글자만 적어 보냈다.
‘종신여시(終愼如始)/나중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하라’
무릇 인간이란 처음에는 의욕이 넘쳐 일을 시작하나 나중에는 흐지부지되는 경향이 많으니,
부디 임금께서는 초심을 잃지 말고 끝까지 흔들림 없이 성군의 길을 가라는 당부의
말이었다.
작년 10월 중순경, 밴쿠버 한인 성당에서 신약성경 필사 반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장고 끝에 필사를 신청했다. 가톨릭에 입문한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성경을 완독하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성경 필사였다. 올해 9월을
목표로 이번에는‘종신여시’, 끝까지 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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