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완기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장
어느새 8월이다. 마냥 뜨겁고 한없이 길 줄만 알았던 햇살도 수그러지고, 바야흐로 입추(立秋), 가을로 접어드는 초입이다. 산책길 늘 만나는 나무는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푸르렀는데 속살부터 홍조를 띄워가고, 잎들 사이사이로 바늘 같던 햇살은 참빗같이 성겨져 가지 사이로 조용히 스며든다. 문득 시절(時節)마다의 이름들과 별칭이 있었던 것이 생각나 걸음을 멈추고는 폰을 꺼내서 구글 창에’한국 세시 풍속 사전’ 과 각 달의 별칭을 한번 검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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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 5월. 음력 5월을 부르는 말. 오월은 하루하루가 깐깐하고도 지루하게 지내는 달이라는 뜻으로 매사 조심하라는 의미가 있으며, 특히 이달은 속칭 악월(惡月)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냉장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음식이 부패하기 쉬운 데서 연유한 것이다.
미끈 6월. 농사일이 바빠 한 달이 미끄러지듯이 빨리 지나간다는 뜻으로 농사의 전성기를 뜻하는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창’이라는 속담 역시, 매사 바쁘게 움직이는 농경문화의 특징을 나타내 준다.
어정 7월, 건들 8월. 글자 그대로 한 여름 폭염과 장맛비 가운데, 나무 그늘 아래서 어정어정 거리면서, 또는 물가에서 천렵을 즐기면서 한량처럼 건들건들대며 보내는 시절이라는 뜻.
동동 9월. 이제 본격적인 수확 철을 맞아 두 발을 동동거리며 일을 해도 바쁘기만한 시절을 뜻함이다.
아쉽지만 해는 점점 짧아지고 아침 저녁 바람은 서늘해지고, 이제 한달 후면 레인쿠버에는 비가 또 일상처럼 오게 되리라. 좀 늦은 인디안 썸머가 이어지겠지만 가을을 시샘하는 질투의 잔열일 따름일것이다.
산책길 반환점에 있는 나무 아래 멈춰 서서 한숨을 돌리며 계절 변화의 숨결을 듣는다. 생전에 아버님이 지금 내 나이쯤 해주셨던 말씀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무는 말없이도 삶을 다 보여준다.”
65년을 넘기며 살아온 나의 발자취를 떠올려본다. 젊은 날의 길은 늘 뜨거웠던 기억뿐이다. 성취와 후회, 설렘과 조급함,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며 경쟁사회속에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기도 하였다. 때론 인정과 남을 앞서기 위해 몸이 망가지도록 허겁지겁 달리기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시절을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들도 결국 하나의 열매를 위한 계절이었음을 알게 된다. 화려하지 않지만 크고 작은 무늬로 빛나는 내 삶의 열매, 그것이 곧 나의 현재의 얼굴이리라.
나이를 먹으며 비로소 알게 된다.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이 다르다는 것을… 손주가 놀이터 마당을 뛰노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세상 어느 시끄러운 일보다 저 작은 웃음 하나가 훨씬 값지다.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라도 성공과 타인의 인정의 고단하고 먼 길을 가야 한다고 믿었었지만, 이제는 가벼운 걸음으로 산책할 수 있는 하루가 더 귀하다. 나이와 시절이 주는 선물임을 깨닫는다.
손을 뻗어 길가 숲 뒤로 흐드러진 블랙베리 한 알을 조심스레 따 손바닥에 올린다. 까맣게 익어 햇살을 잔뜩 머금은 동글동글한 열매가 유난히 반짝인다. 입안에 넣자 그 안에는 나의 지난 세월의 맛이 스며 있는 듯도 하다. 달콤함 만이 아닌, 때때로 스며든 떫고 쓴 맛까지… 그러나 바로 그 쓴맛 덕에 오늘의 단맛을 아는 것일 터.
바람이 불면서 먼저 홍조를 띤 나뭇잎 몇 장이 흩날린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땅에 내려앉겠지. 한평생 제 계절을 살다 간 나무처럼, 나의 삶도 이미 희로애락과 제 몫의 계절을 채우고 있기에 꼭 두렵지마는 않다. 여름을 보내며 다시 가을 문턱에서 묵묵히 나의 삶을 들여다본다. 많이 늦었지만 내일은 조금 더 단단히, 그리고 조금 더 겸손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끝으로 ‘어정 7월, 건들 8월, 동동 9월’의 지혜를 기억하면서 이제부터라도 시간을 쪼개고 더 아껴서 한 해의 수확을 잘 갈무리 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마음을 동동거리며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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