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지오, 캐나다 크라운 로얄 공장 폐쇄
86년 자존심 버리고 미국行
86년 자존심 버리고 미국行

▲더그 포드 온타리오 수상이 2일 기자 회견장에서 크라운 로얄 위스키를 땅에 부어 버리고 있다. /Youtube
글로벌 주류 기업 디아지오가 캐나다를 상징하는 위스키 ‘크라운 로얄’ 생산 공장 일부를 미국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자 캐나다 전체가 들끓고 있다. ‘왕실(Royal)’이라는 이름처럼 캐나다 국민 자부심과 같았던 브랜드가 미국과 무역 갈등이 고조하는 상황에서 캐나다를 떠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거센 비판이 쏟아졌다. 정치권은 물론 소비자들까지 나서 ‘배신’이라며 불매 운동을 벌였다. 디아지오는 비용 절감을 위해 86년이 넘은 브랜드 정통성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난달 28일 디아지오가 크라운 로얄 공장 이전을 발표한 이후, 이를 둘러싼 논란은 15일까지 가라앉기는 커녕, 더 확산되고 있다. 디아지오는 지난달 온타리오주 애머스트버그에 있는 크라운 로얄 공장을 내년 2월까지만 운영하고 폐쇄한다고 밝혔다.
이 공장은 1970년 문을 열어 55년 동안 병입을 담당했다. 병입은 숙성한 위스키 원액을 물에 희석해 도수를 맞추고, 병에 넣는 핵심 제조 공정이다. 이 과정에서 색을 맞추기 위해 캐러멜 색소를 넣거나, 투명성을 더하기 위해 여과를 하기도 한다. 디아지오는 공장 폐쇄가 “공급망 효율성을 높이고 미국 소비자와 더 가까워지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크라운 로얄은 1939년 영국 조지 6세 국왕 부부가 캐나다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만든 술이다. 캐나다산 곡물과 매니토바주 위니펙 호수 물로 만들어 캐나다 정체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제품으로 꼽힌다. 미국에서도 캐나다(Canadian) 위스키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다. 미국 내 캐나다 위스키 카테고리에서 점유율이 42%에 달한다.
디아지오는 위스키 원액을 만드는 증류(distillation)와 숙성(aging) 과정은 캐나다 매니토바주 김리, 퀘벡주 밸리필드 시설에서 계속 진행하겠다고 했다. 미국 공장은 캐나다에서 넘어온 고도수 원액을 받아 물을 섞어 도수를 맞추고(加水), 최종적으로 병에 담는 병입(bottling)과 포장, 미국 내 물류를 담당한다.
캐나다 법률상 ‘캐나다 위스키’는 ‘캐나다산 원재료를 사용해 캐나다에서 원액을 증류·숙성한 술’이다. 병입 장소는 필수 요건이 아니다. 미국에서 병입하더라도 ‘캐나다 위스키’ 표기는 법적으로 유효하다. 이런 이유를 들어 디아지오 측은 법적으로 ‘캐나다 위스키’라는 표기를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캐나다 국민들 생각은 다르다. 위스키 시장에서 생산 전 과정 현지화는 브랜드 정통성과 직결된다. 가령 ‘싱글 몰트 스카치’는 반드시 병입까지 스코틀랜드에서 해야 한다. 조니 워커(스코틀랜드)나 제임슨(아일랜드)처럼 각 국을 대표하는 대중적인 위스키들 역시 증류(Distilled), 숙성(Matured) 그리고 병입(Bottled) 모두 자국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크라운 로얄 역시 북미권에서 디아지오 실적을 견인하는 핵심 브랜드다. 그 명성의 근간에는 ‘캐나다 대자연이 준 원재료와 물로 80년 넘게 이어온 장인정신이 빚어낸 술’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이 있었다. 크라운 로얄을 미국에서 병입하게 되면, 매니토바주 위니펙 호수 물로 도수를 맞추던 전통은 사라진다. 이 때문에 캐나다에서는 ‘미국 물’을 섞은 위스키를 과연 ‘캐나다 위스키’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논란이 일었다. 애머스트버그 공장에서 24년간 일한 한 직원은 온타리오주 매체 토론토 선에 “미국 물을 사용하면 더는 캐나다 위스키가 아니다”라며 “맛과 품질 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류업계에서는 디아지오가 표면적으로 ‘공급망 효율화’를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과 캐나다 사이 관세 전쟁으로 생기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고 보고 있다. 캐나다산 위스키는 현재 CUSMA(캐나다-미국-멕시코 협정)에 따라 무관세 대상이다. 다만 예측을 불허하는 트럼프 행정부 관세 정책에 따르면 국가 안보 등 다른 명분을 내세워 언제든 캐나다산 주류에 다시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섬유·의류, 전자·가전 등에는 이미 35% 보복관세가 붙었다. 위스키 원액을 미국으로 들여와 현지에서 병입하면 미국산 제품으로 분류돼 이런 무역 분쟁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디아지오가 공식적으로 밝힌 ‘물류 효율화’와 노조가 주장하는 ‘인건비 절감’ 역시 중요한 동기다. 크라운 로얄 최대 시장은 미국이다. 캐나다에서 생산한 완제품을 미국 전역으로 운송하는 것보다, 원액을 미국 내 생산 거점으로 옮겨 현지에서 병입·배송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글로벌 주류업계에서는 저렴한 위스키에 ‘인마켓 보틀링(In-Market Bottling)’이라 불리는 이 전략을 종종 사용한다. 공장 이전 후보지로 거론된 앨라배마주는 노조 영향력이 약한 ‘노동권리법’ 시행 지역이다. 노조 영향력이 강한 온타리오주에 비하면 장기적으로 인건비와 노무관리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류업계 관계자들은 평가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공장 폐쇄 결정이 브랜드 정체성을 뒤흔드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했다. 단기적인 비용 절감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86년 동안 쌓은 브랜드 유산과 소비자 신뢰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위스키 시장은 다른 주류보다 보수적인 시장이다. 소비자들은 브랜드가 지닌 역사와 진정성에 큰 가치를 둔다. ‘100% 캐나다산’이라는 핵심 가치가 흔들린다면, 가격 경쟁력만으로 미국 시장의 충성도 높은 소비자들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있을지 미지수다. 경쟁사들에게 ‘무늬만 캐나다 위스키’라고 공격받을 빌미를 스스로 제공하는 셈이다.
캐나다의 자존심 같은 브랜드가 하필 무역 분쟁 중인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데 대한 캐나다 정치권과 국민들 반발도 만만치 않다. 캐나다 국영 CBC는 상공회의소 관계자를 인용해 “지역 식당들이 크라운 로얄을 사용해 조리하던 요리를 메뉴에서 빼는 등 불매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고 전했다.
더그 포드 온타리오 수상은 지난 2일 기자회견장에서 크라운 로얄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들고 땅에 쏟아 부었다. 그는 디아지오 경영진을 향해 “망치 자루만큼 멍청하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포드 수상은 깨진 병을 가리키며 “이게 크라운 로얄을 향한 내 생각”이라며 “캐나다 국민을 해치면 당신들도 다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포드 수상은 현재 캐나다 관영 주류 판매점 LCBO에서 디아지오가 만드는 모든 제품을 퇴출하는 강경책까지 고려 중이다. 캐나다에서는 주류를 국가가 직접 관리한다. LCBO는 온타리오주 증류주 소매·도매를 사실상 독점한다. LCBO에서 퇴출되면 해당 브랜드는 주 전역에서 매장·온라인 판매가 중단되고, 바·레스토랑 도매 공급이 끊긴다. 현재 온타리오주는 디아지오에 연간 7억4000만 캐나다달러 어치를 구매하는 북미 최대 소비권이다.
영국 가디언은 “포드 수상은 미국 보호무역주의에 가장 강력하게 맞서는 캐나다 정치인 중 한 명”이라며 “이번 사태가 양국 간 무역 갈등 속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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