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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계곡에서 출발해 소리 없이 흘러온 물이 수문 앞에 다다라 소용돌이쳤다. 태양이 서포루(화성 서측 성벽 위 2층 누각) 너머로 뚝 떨어지는 순간, 사나운 포성을 질렀다. 기울어지지 않고 평평하던 물이 일곱 홍예(화성의 북쪽 수문)를 지나 수직 낙하하며 갑자기 격정의 폭포수로 변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실개천보다 크고 일반 하천보다 작은 공간에 소망을 추구하는 사람, 우연의 재회를 꿈꾸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꿈들이 모여 방주의 천정...
박병호
내 인생의 강물 2023.02.06 (월)
    인생의 강물은 내 맘대로 흐르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다. 완만하게 굽이돌며 한 없이 흐른다. 거침없이 흐르는 푸른 강물이다. 내가 나에게 끼어들 새가 없다. 일반적으로 강물에 실린 그리움과 기다림의 원천은 어머니다. 그런데 나의 그것들은 내 나이 열한 살 때, 보라색 치마에 긴팔의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온 띠동갑의 한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시집갈 나이 스물셋에 산골 초등학교에 주산 선생님으로 왔다. 살랑살랑...
박병호
노인이 걷는다. 누가 뭐래도, 초원에서는 볏짚으로 만든 신발만을 고집하는 노인이다. 그가 발걸음을 크게 떼면서 위엄 있게 들판을 천천히 걷는다. 오직 한 소년만이 노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소년의 뒤는 작은 반달가슴곰을 닮은 태즈메니아 데빌이 따라 걷는다. 천 주나 되는 배롱나무가 잘 자라도록 잔 가지치기를 한나절 만에 끝낸 뒤다. 열이 난 몸을 식혀야 했다. 청회색을 띤 흰색의 매끄러운 줄기와 회녹색의 둥근 잎을 뽐내는 유칼립투스 나무...
박병호
열대우림 속 창문을 열자 햇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순간 교실 미닫이문이 열리며 선생님이 사슴 돼지 한 마리를 끌고 들어섰다. 그 녀석은 주름이 많은 회색빛 몸통에 축 처진 갈색 꼬리를 달고 있었다. 사슴을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고, 다리가 긴 멧돼지와 비슷했다.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입학 후 첫 대면 수업, 몇몇은 올 수 있지만 대부분은 안 올지 몰라. 첫 수업 일을 내일로 아는...
박병호
도전의 향기 2021.09.13 (월)
박병호 (사)한국문협밴쿠버지부 회원네스라는 섬에 카를로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어요. 와인 상인의 아들이었지요. 그의 가문은 옛날부터 더 나은 땅들을 찾아 바다 건너 포도밭을 일구어 왔어요. 그의 할아버지는 잉글랜드에서 시칠리아 섬으로, 아버지는 시칠리아 섬에서 네스 섬으로 왔지요.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어요. 오로지 황금색 오로 와인이라 불리는 꿈의 포도주를 만들어내기 위한 포도를 키우기...
박병호
아웃오브 오션 2021.05.25 (화)
조선일보 동화 박병호 그날은 상상했던 것보다는 차갑지 않았다. 남극의 얼음장 같은 찬물이 짙푸른 태즈먼해 수면 바로 아래까지 흘러온다. 원래는 그곳에 손을 담그려면 후다닥 넣고 빼야 한다. 까딱 늦게 빼면 동상이 들기 때문이다. 해안 육지는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데도 그런다.  잠시만이라도 선한 괴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크라켄을 찾으러 바다에 왔다. 그날은 바닷물 속에 오랫동안 손을 담글 수 있었다. 괴물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박병호
박각시나방 2020.11.23 (월)
윌리엄은 다시 뛰었다. 발바닥이 아파 멈칫했지만, 젖 먹던 힘을 다했다. 동굴을 쳐다보니 박쥐는 이미 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굴 천정에 꽉 달라붙기 전에 잡아야 했다. 방학이 끝나가는 오늘은 잡아야 내일 학교에 가져갈 수 있었다. 그는 동굴 앞에 와서야 달리기를 멈추었다. 안으로 들어가 물이 있는 곳까지 걸었다. 발바닥 상처를 씻고 싶었으나, 박쥐부터 찾았다.   잠시 후 동굴 안으로 다른 박쥐들이 길게 줄지어 들어왔다. 몇 번 천정을...
박병호
할머니의 선물 2020.08.24 (월)
할머니의 볼록한 발등에 손을 댔다. 아직 부기가 가시지 않았다. 보통은 1, 2주면 가신다는데…“이제 통증은 가셨어요? 곧 고모가 오실 거예요.” 귀먹은 할머니의 귀에 속삭였다. 아직 주름 하나 없이탱탱한 할머니의 얼굴이 고운 주름 꽃을 펼치며 미소 짓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데창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왔다.달칵 문이 열리자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고모!’마음속으로만 고모를 불러 보았다. 한 번도 큰 소리 내어...
박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