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늦었던 랭리 소년의 ‘세계 1위 의대' 합격 사연

손상호 기자 ssh@vanchosun.com

최종수정: 2024-06-07 09:24

英 옥스퍼드 의대 합격한 랭리의 선이헌 군
할머니 치매 소식에 로스쿨서 의대로 진로 바꿔


옥스퍼드 의대에 합격한 선이헌군

랭리에 거주하는 한 한인 학생이 세계 1위 의대(2024 THE 대학랭킹 기준)로 평가받는 영국 옥스퍼드 의대에 합격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해 랭리 R.E 마운틴 세컨더리 스쿨을 졸업한 선이헌(영어명 Ian·18)군은 올해 초 영국의 옥스퍼드 의대와 임페리얼칼리지런던 의대에 동시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영국의 의대는 외국인 정원이 전체의 약 10%에 그칠 정도로 국제학생 경쟁률은 매우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선군은 영국 의대 입학시험인 BMAT에서 훌륭한 성적을 받아 1차 합격 명단에 포함됐고, 다섯 번에 걸친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할 수 있었다. 올해 옥스퍼드 의대는 약 10명의 국제학생만을 선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심 끝에 옥스퍼드대를 선택한 선군은 의대에 가면 심혈관계를 열심히 공부해, 최대한 많은 생명을 구하고 싶어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수학 쳐졌던 아이, 美 명문대 합격하다

 

5세였던 2010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온 선군은 말을 또래보다 현저히 늦게 시작했다고 한다.

 

부모님께서 워낙 간섭을 하지 않으시는 스타일이라,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집에서 공부라는 것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던 중 선생님께서 저의 수학 실력이 너무 쳐진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고, 부모님께서는 그제야 공부를 도와주셨죠.”

 

선군은 세컨더리스쿨 입학 후 본격적으로 공부에 취미를 갖기 시작했다.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10시간 이상 꾸준히 앉아있을 수 있는 인내심 덕분에 학교에서는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했고, 각종 경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

 

그리고 9학년부터 미국 대학 입학을 목표로 SAT ACT 시험을 준비한 결과, 작년 입시에서 에모리대, 듀크대, UCLA, 시카고대 등 미국 명문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다.

 


외할머니의 치매 진단 소식은 선이헌 군이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진로 바꾸게 된 할머니의 치매 소식

 

아버지의 모교이자 전액 장학금을 제안하기도 한 에모리대 진학으로 마음을 굳혔던 지난해 봄 선군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던 외할머니의 치매 소식을 접했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저와 제 동생을 많이 돌봐 주셨어요. 그런 저에게 할머니의 치매 소식은 충격이었어요. 그리고 할머니의 기억이 그나마 남아있는 지금, 최대한 시간을 함께 보내자하는 마음에 대학 입학을 결국 1년 미루기로 했습니다.”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모든 가족의 삶의 질도 현저히 저하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자, 건강이 사람의 행복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깨닫게 됐다. 변호사가 꿈이었던 선군이 의대 진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선군은 지난여름 난생처음 떠난 유럽 여행에서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반해, 유럽 대학교 진학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됐다. 마침 의대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의대에 지원해야 하는 캐나다와 미국 시스템과는 달리, 영국은 학사부터 의대에 진학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결국 그는 작년 여름부터 영국 의대 입학을 목표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수학과 과학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고 생각해, 논리 관련 문제를 1000개 이상 풀었던 것 같아요. 시험이 10월이었기 때문에 8, 9월은 매일 하루에 6시간씩 공부했고, 의사의 도덕성과 환자에 대한 마인드를 키우기 위한 책도 10권 정도 읽었지요. 또한 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풀고, 답은 알지만 정답인 이유를 모를 때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 때까지 복습했습니다.”

 

조지아주립대와 에모리대에서 공부했고 SAT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던 아버지 선창은 씨의 도움도 컸다. 선군은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하루에 한 시간씩 아버지와 토론을 하면서, BMAT 에세이와 의대 면접도 동시에 준비했다.

 


팬데믹 시기, 선군은 친구들과 길거리 오케스트라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포트랭리에서 공연하던 당시 모습

음악 통해 기부활동 하는 팔방미인

 

선군이 공부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가 취미였던 그는 팬데믹 시기에 친한 친구들과 소봄이라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활동했다. 주말마다 밴쿠버, 켈로나, 밴프 등을 돌아다니면서 길거리 공연을 열었고, 모금 활동을 통해 모은 돈은 북한 어린이 돕기와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시는 나눔의 집에 기부를 했다.

 

특히 2년 전 여름 한국 여행 당시 나눔의 집에서 <고향의 봄>을 연주했을 때 귀도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들이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는 모습은 지금도 마음 깊숙하게 남겨져 있다.

 

10월 입학을 앞둔 선이헌군은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

 

할머니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 걱정이 많아요. 여느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최근 기억부터 사라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제가 옥스퍼드에 합격한 일은 절대 잊지 않으세요. 요즘은 과외를 하면서 용돈을 버는데, 여름 동안 돈을 더 많이 모아서 할머니의 고향인 여수 여행을 함께 떠나려고요. 기억이 더 지워지기 전에 여행을 하면서 할머니의 옛날 기억을 듣고 싶어요.”

 

손상호 기자 ssh@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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