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로부터의 자유

윤의정

최종수정: 2024-06-17 14:57

윤의정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으로 향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를 내리는 일이다. 작년에 구입한 캡슐형 커피 머신에 물을 붓고 캡슐 커피를 넣은 후, 버튼만 누르면 갓 내린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습관처럼 하루 일과를 커피를 내리는 일로 시작하고, 나 스스로도 커피를 마셔야 정신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화장실을 평소보다 더 자주 찾는 나를 발견했다. 또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새벽 두세 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곤 했다. 처음엔 별로 기분 탓이겠거니, 이러다 말겠거니 했던 일들이 점점 증상이 심해지면서 스스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몸이 어딘가 고장 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내가 갖는 증상을 검색해보니, 이 모든 증상이 커피를 마셨을 때 갖는 부작용이었다. 20년이 넘게 커피를 마셔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기분만 있었는데, 이런 부작용을 갖게 된다니 조금 이해되지 않고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그때는 젊었고 지금은 나이가 들었으니 분명 신체 능력에 차이가 생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체질이 변한 걸 수도, 그것도 아니면 건강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었다.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편이 좋다는 답을 얻은 나는 습관처럼 찾던 커피를 줄여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 아침이면 의도하지 않아도 다시 부엌으로 향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문득 커피를 끊어야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거나, 그냥 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등 소소한 노력을 들여보았다. 물론 생각보다 많이 힘이 들었다. 습관이란 그런 것이다. 갑자기 하던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더 힘든 건 일종의 불안감이었다. 단지 한 잔의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제약에 불과했는데, 무언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자꾸 엄습했다. 이건 물리적인 현상인지, 단순히 정신적인 불안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앉아서 제 일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부엌을 오가는 나를 발견했다. 평소보다 집중하는 것도 꽤 힘들었는데 하나의 일을 끝내는 데 평소보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이런 불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커피를 끊은 첫날은 처음 의지가 그대로 있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물로 대신할 수 있었고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은 무척 힘들었고, 그다음 날은 아주 많이 힘이 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차에 느끼는 불안감의 크기가 가장 컸다. 그래도 한 잔 마셔야 하나 싶은 내 안의 욕망과 내 의지가 자꾸 다투었다. 나 스스로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었구나를 깨닫기도 했고, 그동안 무언가에 인지하지 못한 채 중독되어 의존적인 삶을 살고 있었구나 반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힘들기만 했던 일주일을 버텨내자, 신기하게도 바로 그다음 날 아침 무언가 전날과 다른 가벼운 기분을 느꼈다. 굳이 무언가 마시고 싶다는 욕구도 없고, 잠이 덜 깨어서 억지로 깨울 수 있도록 외부 자극을 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고, 오히려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은 중독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커피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보기도 했다. 분명 커피에 나는 중독되었던 것이고, 커피로 인해 잠을 깼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잠을 깨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 커피를 완전히 끊었는가라고 하면, 아직 그렇다고 대답하긴 어렵다. 그 후로 미팅을 하며, 과식 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또 커피를 야금야금 마시기도 했다. 다행히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전보다 몸이 더 강하게 반응하고, 별로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전보다 확실히 덜 마시게 되긴 했다. 하지만 아직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커피 없이도 일상에 지장이 없고, 더 멀쩡히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몸에 완전히 익히기까지 말이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매여 중독되었던 이전의 나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내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쁘긴 하다. 어렵지만 언젠가 완전히 커피와 안녕을 고할 날이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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