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주(州)에 사는 샌드라 네이선씨는 은퇴한 인권·노동 변호사(retired civil rights and labor lawyer)다. 올해 75세인 그녀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코로나19 감염 숫자 때문에(owing to the exploding number of COVID-19 cases) 갈수록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다(feel increasingly isolated).

 

코로나 생존박스/샌드라 네이선 트위터코로나 생존박스/샌드라 네이선 트위터

그런데 며칠 전 소포 하나를 받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코로나19 생존 박스(COVID-19 Survival Box)’라고 쓰여 있었다. ‘한국을 위한 귀하의 헌신에 감사 표시로(as a token of our gratitude for your dedication to Korea)’라는 메모와 함께 마스크 100장, 항균 장갑(antibacterial gloves), 홍삼 캔디(red ginseng candy), 은수저(silver chopsticks and spoons), 비단부채(silk fan), 피부 보호제(skin-care product) 등이 들어 있었다. 네이선씨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마치 1968년부터 나를 향해 기나긴 여행을 해온 상자 같았다. 거기에 담긴 마법 같은 것이 나를 눈물짓게 했다(bring me to tears)”고 했다.

 

54년 전인 1966년, 시카고대학을 갓 졸업한 21세 때 한국에 가는 평화봉사단(Peace Corps)에 자원했다. 우여곡절 끝에(after many twists and turns) 춘천에서 여고생들 영어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됐다. 당시 한국은 질병과 독재, 가난과 6·25전쟁 폐허 더미에 찌들어 있었다(be stricken by disease, dictatorship, poverty and ruins left by the Korean War).



 

아이들은 신발도 없이 돌아다녔다. 밤이면 쥐들이 천장을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으며(hear rats running across ceilings) 밤잠을 설쳐야 했다(sleep fitfully). 뒷간엔 화장지도 없었다(be unavailable). 평화봉사단원들의 논쟁거리 중 하나는 타임지(誌)와 뉴스위크 중 어느 것을 찢어 닦는 것이 낫냐는 것이었다.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해야 했고, 교실에는 작은 숯불 난로(charcoal stove) 하나뿐이어서 햇볕 드는 곳을 쫓아다니며 체온을 유지했다(maintain her body heat).

 

그런 환경에서도 학생들은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려 했고(be eager to learn English), 네이선은 그런 아이들에게 흠뻑 정이 들어갔다(grow very attached to them). 2년 동안 애틋한 사연이 많았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유난히 자주 아픈(be sickly) 아이가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미군 군의관에게 데려가 장내 기생충 치료(treatment for intestinal parasites)를 받게 했다.

 

엄마가 찾아왔다. 눈물을 글썽이며(with tears in her eyes) 뭔가를 내밀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달걀 몇 개였다. 깃털이 붙어있었다. 정작 그 달걀을 먹고 기운 차려야 할 이는 그 모녀라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be close to tears).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며칠 전, 그 후손들에게서 소포를 받았다. 그 안에는 깃털 묻은 달걀 대신 네이선씨를 지켜주겠노라 보내온 코로나19 생존 물품들이 들어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참조 영문자료 사이트]

 

https://www.nytimes.com/2020/11/20/world/asia/korea-coronavirus-care-package-peace-corps.html